대흥사 북암(北庵)에서의 추억

이법철 | 입력 : 2016/09/25 [11:35]

 해남 대흥사 산내 암자로 주산(主山)인 두륜봉 밑에 북미륵암(北彌勒庵)이 있다. 북미륵암은 주로 북암(北庵)으로 호칭된다. 북암의 법당에는 당시 보물이라는 돌미륵상이 오랜세월 은은한 천고의 미소속에 영험을 나투고 있다.

 

나는 70년대 초에 대흥사에 있는 서산대사의 제향을 받드는 표충사(表忠祠) 옆 요사채 구석방을 얻어 걸망을 내려놓고 혼자 서책을 보거나 면벽참선을 하며 살았다. 이제 노승이 되어 회고하니 홍안의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은 데, 많은 세월이 흘렀고, 마치 일장춘몽(一場春夢)같은 생각이 든다.

 

그해 늦가을이었다. 아침 공양 때를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표충사 요사채에서 1km 쯤 거리가 있는 대흥사 큰방에서 아침 공양을 마치고 난 후 주지스님이 대중에게 딱한 사정을 말했다. 북암의 암주(庵主)인 승려가 떠나가 북암이 비어 있다는 것이었다. “조석 예불도 해야 하고…암자가 비어 있으면 안되지…누가 자원할 사람 없는가?” 주지스님은 자원자를 찾고 있었다.

 

십여 명의 승려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묵묵부답이었다. 주지스님이 대단히 실망한 듯한 얼굴로 재차 자원자를 찾았다. 아무도 자원하지 않았다. 그 때 나는 “제가 가겠습니다.”자원했다.

 

왜 북암이 텅 비어 있을까? 당시 북암은 봄, 여름, 가을은 등산객이 드문 드문 왕래했고, 때로는 돌로 조성된 미륵불 앞에 종이 돈과 동전이 조금 놓여서 그 돈의 계절이면 승려가 머물렀지만, 가을이 끝나고 겨울에 들어서면 승려는 떠나가 버렸다. 돈이 안 생기는 높은 산에 있는 고독한 암자에 승려는 살려고 하지를 않았다.

 

북암에 살기에 제일 걱정해야 할 사항은 식량, 반찬 등이었다. 식량은 큰 절인 대흥사에서 얻어 걸망에 담아 가파른 산길을 애써 등산을 하여 운반해야 했다. 나는 식량은 걸망에 담고 반찬으로 간장으로 조림 콩 반찬 조금을 그릇에 담아 손에 들고 혼자 북암으로 올라갔다. 북암에 당도하여 미륵불상에 향을 피우고 삼배의 큰 절을 올리고 신고식을 하였다. 그 때 나는 미륵불상을 향해 이렇게 푸념하듯 말했다고 기억한다.

 

“영험을 내리셔서 겨울에도 돈이 오게 하셨으면 승려가 떠나지 않았을 텐 데 어쩌자구 겨울에는 무일푼입니까?” 부처님은 은은히 웃을 뿐이었다. 

 

나는 북암 암주로 취임 첫째 일이 겨울준비로 나무를 하는 것이었다. 매일 나무를 하면서 궁여지책(窮餘之策)이 겨울 동안 관음기도의 주력(呪力)을 하기로 작정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나는 관음기도를 하여 작은 신통력이라도 얻을 요량이었다. 나무를 하면서도 관세음보살, 주야로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하지만 매일 고되게 나무를 하다보면 피곤하여 관음기도의 정진은 커녕 매번 코를 골아대어 잠이 깨면 내 손바닥으로 따귀를 치며 자책해 마지 않았다. 어느 날, 코를 골고 자다가 깨어 방문을 나서니 방문 밖은 밤새 하얀 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어느 날 북암 요사채 가까이 염소 소리들이 들려왔다. “아니 마음에 있는 염소들이 북암에 찾아왔나?” 소리 들리는 곳을 찾아보니 두륜산에 사는 산양(山羊) 떼들이었다. 나는 산양 떼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어∼이 산양들, 우리 친구처럼 잘 지내세.” 산양들은 마을의 염소처럼 “메헤헤헤” 소리를 내어 응수하듯 하였다.

 

북암의 요사채는 방이 두 개 뿐이었다. 방하나는 내가 쓰고, 하나는 식량 등을 보관하는 방으로 썼다.

 

나는 어느정도 나무를 해놓고 차가운 법당에서 미친듯이 관세음보살을 불러 대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독감이 찾아왔다. 준비된 약도 없었다. 기침이 나날히 거세어졌다. 나는 하산하여 해남읍에 있는 병원을 찾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스스로 질책했다. 인연이 있어 독감이 왔으니 인연이 다하면 독감은 떠나가지 않겠느냐는 한심한 인연법으로 참을 수 없이 기침을 하면서도 참았다.

 

당시 대흥사 주지스님은 감기에 특효가 있다는 괴상한 처방을 대중에게 권하여 유명했다. 승려들이 감기로 고생하면 소주를 맥주 잔에 가득 담아 고추가리를 듬북 섞어 단숨에 마시고 잠을 자고나면 감기는 뚝 떨어진다는 주지스님의 체험적 약처방이었다. 나는 기침을 심하게 하면서 그 약처방을 하고 싶어도 북암에 소주가 있을 리 없다. 거의 20일 가까이 기침을 하고나니 갑자기 두 귀가 잘들리지 않았다. 나는 감짝 놀랐다. 나는 황급히 방문을 자물통으로 잠궈 놓고 하산하여 해남읍에 당시 유명한 제중의원을 찾아갔다. 검진한 후 의사는 탄식했다. “진즉 병원을 찾아야지 무슨 인연법이요?”

 

의사는 기침을 멎게 한다는 큰 주사를 나의 팔뚝 혈관주사로 놓고 약처방을 해주며 이렇게 말했다. “쇠소기 두 근을 먹으면 귀가 열릴 것이요. 스님은 극도의 영양실조요, 독감 치료도 문제지만 영양보충으로 쇠고기를 먹으시오. 부처님도 계율을 파했다고 나무라지 않으시고, 이해 하실거요.”

 

나는 대흥사 밑에 있는 안덕여인숙의 여주인을 찾아 하소연했다. 그녀는 대흥사 전 주지의 부인으로서 불교정화 바람에 대흥사에서 나와 사하촌(寺下村)에 여인숙을 열고 있었다. 그녀는 통이 크고 젊은 승려들을 보면 농담으로 놀려대기를 취미로 삼는 할멈, 즉 노보살이었다. “고기 생각이 나서 왔지?” 그녀는 기침을 쿨럭이는 나를 놀렸다. 그녀는 어머니같이 나에게 귀가 열리는 영양보충을 해주었다.

 

독감치료 때문에 7일만에 나는 또다시 대흥사에서 쌀과 반찬을 걸망에 담고 손에 들고 북암에 올랐다. 북암 가까이 다가서는 데, 암자에서 요란한 무당의 굿판에서 울리는 징, 장구, 새납 등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왔다. 요사채 방문의 자물통은 부서지고 방문은 활짝 열렸고, 요사채 앞의 우물가에는 3∼40대의 젊은 여자들이 겨울날에도 냉수로 몸을 씻고 있었다. 10여 명의 남녀가 북암을 점령하여 미륵불상 앞에 굿판을 벌려놓고 있었다. 불상 앞에는 돼지 대가리 세 개가 인간세상을 조소하는 듯한 표정과 입에는 돈을 잔뜩 물고 있었다. 나는 경악하여 소리를 지르고 굿판을 막아 서 호통을 쳤다. “법당안에 돼지 대가리는 안됩니다!”

 

대황(大皇)마마라는 여교주격의 60대 중반의 하얀 한복을 입은 여성이 나타나 우선 나를 큰소리로 꾸짖었다. “중이 절을 비워두고 어디를 싸 돌아 다니는가?”

 

“당장 불상 앞에 돼지 대가리를 치우시오.”

내가 호통을 치니 하얀 한복을 입은 교도 같은 남성이 낫을 들고 와서 나의 목에 걸었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더 이상 지껄이면 낫으로 네 놈 목을 잘라 버리겠어.” 부처님은 은은히 웃고만 있었다. 위기의 순간에 대황마마라는 여교주가 권위있게 손으로 낫을 치우라고 신호를 보내니 그제서야 낫을 내목에서 치웠다. 운수 불길 했으면 그 때 나의 목은 낫으로 잘리지 않았을까, 지금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대황마마의 교도들과 나는 약속을 했다. 기도를 시작했으니 이틀 후 12시에 절을 비워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나는 그 약속을 믿고 함구하고 대흥사로 내려가야 했다. 나 혼자 제정신 아닌 듯한 교도들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대황마마라는 교주는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토종 스님의 얼굴이구만. 전생에 중이 또 온거요.” 그녀는 번쩍 할 새에 손을 써 하산하는 나의 호주머니에 돈봉투를 넣어 주었다. 북암의 임대료 같았다. 사흘 후 내가 돌아와 보니 암자는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북암의 미륵부처님께 1천배의 참회기도를 하였다. 독감이 들어 치료차 암자를 비운 탓으로 미륵불상 앞에 돼지 대가리들을 진열해놓게 한 것이 “제 탓입니다.” 참회기도를 한 것이다. 미륵부처님은 은은히 미소를 지은 가운데 이렇게 법어를 주시는 것같았다. “중생계에 있을 수 있는 일이지”

 

나는 내가 애써 해놓은 겨울나기 나무를 대황마마 일행이 거의 소진하여 나는 또다시 눈속에 나무를 하기 위해 투덜거리며 애써야 했다. 그해 겨울 한철은 눈쌓인 북암에서 혼자 주야로 깨어있으면 관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정진으로 시간 가는 줄 몰았다. 독자들은 상상해보시라. 대흥사 주산 밑의 눈쌓인 북암에서 혼자 관음기도를 하는 나의 20대 초반의 모습을…. 회상하면 엊그제 같은 데 이제는 눈물이 나도록 그리운 아득한 추억이 되었다.

 

우리는 태양이라는 항성(恒星)을 중심으로 돌고 도는 지구라는 행성(行星)에 잠시 동시대에 만난 인연이다. 나는 지구를 태양을 돌고 도는 윤회열차라고 생각한다. 동 시대의 윤회열차 승객으로 살다가 인연이 다하면 죽어 육신은 사라지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북암에서 만난 대황마마도 그 교도들에게 나는 왜 따뜻하게 인사를 하고 위안의 말을 해주지 못했을까. 나의 오만과 우치(愚癡)에 대해 자책해 마지 않는다. 원각경에 깨닫고 나면 일체가 허깨비(幻)라고 했다. 무(無)요, 공(空)일 뿐이다.

 

70년대 초에 내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갔다. 불교를 믿거나 신을 믿는 사람도 죽고, 안 믿어도 죽고, 이 세상 누구던 인연이 다하면 저승사자를 피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의 위안이라고 생각한다. 고통스럽고, 슬프고, 외롭고, 불안한 인생에 종교로써 마음의 위안을 삼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고해중생에게 진심으로 위안의 말씀도 없으면서 공갈협박으로 돈을 갈취해서는 안된다고 나는 주장한다. 나는 세연(世緣)이 다하기 전에 대흥사 북암에 마지막으로 찾아가고 싶다. 천고의 미소를 은은히 보이는 돌미륵 부처님은 내게 무어라 법어를 내리실까? ◇

 

이법철(이법철의 논단/www.bubchu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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