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와 천주교 십자가

이법철 | 입력 : 2016/09/24 [08:58]

 

사명유정(四溟大師=1544∼1610)는 임진란 때 스승 서산대사와 함께 “우리가 호국불교로 목숨바쳐 백성을 보호하자!”로 구호하고, 조선팔도에 의승병을 소집하는 격문을 보내 의승병을 조직하여 전선에 나서 실천한 구국, 호국의 승장이다. 그 사명대사가 한반도 최초로 천주교 십자가를 들여왔다.

 

사명대사는 전쟁이 끝난 후는 “다시는 전쟁하지 말자”는 강화조약을 맺기 위해 일본국에 건너가 새로운 실권자인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조약을 맺었다. 사명대사는 귀국 길에 이에야쓰를 설득하여 전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간 포로 3천5백여 명응 석방하도록 하고, 포로들과 함께 귀국길에 오르게 한 한반도 역사에 전무후무(前無後無)할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사명대사는 일본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일본 조정에서 서양의 천주교 신부를 처음 만났다.

 

그 때 사명대사는 서양에는 천주교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명대사와 그 신부는 서로 예를 갖추며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종교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헤어질 때 한없는 아쉬움을 표하며 서로의 추억과 신표(信標)를 교환 하였다. 사명대사는 신부에게 자신의 염주를 신부의 목에 걸어 주었고, 신부는 자신의 은제 십자가를 사명대사의 목에 걸어 주었다. 따라서 사명대사는 귀국길에 십자가를 소중히 조선으로 가져온 것이다. 

 

사명대사는 임금에게 귀국 보고를 마치고는 곧바로 묘향산에 주석하고 있는 스승인 서산대사를 찾아가 예배하고 귀국보고를 하였다. 사명대사는 귀국 보고를 드리면서 은제 십자가를 내놓고 신부에게 들은 천주교에 대해 보고를 드렸다. 서산대사는 십자가를 들어 신기한듯 보며 천주교의 교리를 듣고 경의를 표했다. 십자가를 호의적으로 보는 서산대사에게 사명대사는 십자가를 선물했다. 서산대사는 십자가를 소중히 간직했다.

 

서산대사의 법명은 청허이다. 일생을 거의 묘향산에 주석하며 수행과 전법과 불교의 호국사상을 실천하였다. 묘향산이 서쪽에 있기 때문에 일명 서산대사로도 불리었다. 서산대사는 임진난 때 조선팔도 의승병의 총사령관인 도총섭(都摠攝)의 지위를 임금인 선조로부터 받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 진력했으나 전난이 끝난 후는 곧바로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공을 이루면 반드시 물러난다(功遂身退)”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무슨 예감에서인지, 서산대사는 임종 즈음하여 거의 평생을 산 묘향산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서산대사는 어느 날, 상좌들에게 유언하기를, 자신이 입적하면 자신이 평소에 간직한 유품들을 모두 해남 대흥사로 운반하여 보관하도록 엄명했다. “대흥사는 병화(兵禍)가 침입하지 않는 길지(吉地)이니 그곳에 자신의 유품일체를 보관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산대사의 유품 일체는 북한 땅이 아닌 대한민국 해남군 삼산면 두륜산의 대흥사에 운반 된 것이다.

 

임금은 대흥사 변두리에 서산대사의 제향을 받드는 표충사(表忠祀)를 지어 주었다.

 

표충사에는 해마다 기일이 되면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사명대사, 뇌묵대사 등 서산대사의 제자들모시고 대흥사 사부대중과 가까운 고을 수령들이 동참하여 제향을 받들고 그 전통은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해마다 표충사의 제향을 받드는 날이면 사부대중은 물론, 해남군수를 비롯해서 각 기관장, 인근의 시장군수와 목포 해역사의 장성까지 참여하여 서산대사의 호국사상을 기려오고 있다.

 

1971년 봄, 나는 대흥사 표충사 요사채 구석방에서 혼자 서책을 보는 인연이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대흥사의 보물장(寶物藏)을 구경했다. 고찰의 본사마다 보물장이 있다. 그 사찰에서 전해오는 보물을 집합해 전시하는 것이다. 대흥사의 보물장에는 대부분 서산대사의 유품이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 날, 나는 처음으로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가져왔다는 설명이 붙은 십자가를 보았다. 십자가는 족히 20cm는 되어 보였다. 나는 유리관 속에 진열해논 십자가를 응시하며 사명대사와 서산대사를 생전에 만나 가르침을 받지 못한 인연 없음을 함탄하고 간절히 그리워 하였다.

 

대흥사의 표충사에는 탱화가 사당 중앙에 걸려 있었는데, 중앙에는 서산대사의 진영(眞影)과 죄측에는 사명대사, 우측에는 영규대사의 진영이 있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대흥사 표충사에 있는 서산, 사명, 영규 대사의 진영이 진짜 그분들의 얼굴이라는 것이었다. 독자 여러분은 상상햐보시라. 고색 창연한 세 분 조사의 진영 앞에 향을 피우고 참배하는 나의 20대 초반의 모습을….

 

나의 사주팔자에는 지지(地支)에 인신해(寅申亥)의 역마살(驛馬煞)이 많아서인지, 예나 지금이나 행운유수(行雲流水)처럼 전국에 떠돌아 다니기를 좋아한다.

 

나는 수 십년만에 대흥사를 찾았다. 산천은 의구(依舊)한데 인걸(人傑)은 간데없다는 말처럼 예전에 알고 지냈던 승려와 처사들은 이미 한 줌의 재로 화하여 사라져 볼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제행무상으로 낙루(落淚)하면서 표충사를 찾아 세 분 조사(祖師)스님의 진영 앞에 놓인 향로에 향을 피우고, 삼배를 마치고 난 후 진영을 우러르는 데 일순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예전에 본 고색창연한 조사들의 진영이 아니다. 최근에 급조된 실력부족한 화공의 그림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나는 놀라 대흥사 종무소에 확인해보니 어느 날 밤, 도적이 표충사의 세 분 진영들을 모조리 훔쳐가 버렸다는 것이다. 세 분 조사는 어디로 간 것일까? 훗날 간절히 수소문 해본 결과 세 분 조사의 진영은 거액을 받은 대흥사의 어느 승려가 절도범과 짜고 훔쳐 내어 간절히 원하는 일본국에 팔려갔다는 통분한 후일담(後日譚)이 있었다.

 

세 분 조사의 진본 진영이 뒤바뀐 것에 통분함을 참으며 보물장을 찾으니 초의스님의 친필 문집과 입상의 금불상, 화관을 쓴 관음상도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보물급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또한 그 십자가도 사라지고 없었다.

 

모두 도적이 훔쳐가 버렸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보물들을 애통하게 생각하면서 십자가는 제발 도적이 회개하여 한국 천주교에 돌려주었으면 나는 간절히 바랐다. 나는 사명대사의 손을 통해 온 십자가는 한국천주교의 보물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낙심하여 숲길을 걸어 대흥사를 떠나 버스 정류장으로 걷는데, 숲속에서 낯익은 노승이 반가움을 표하며 다가왔다. 나는 그에게 대흥사 보물장에 사라진 보물에 대해 질문하였다. 그도 통탄하면서 “승속(僧俗)간에 돈에 혈안이 된 자들은 불상조차 훔쳐 팔아 먹는 말세가 되었다오.” 전제하며 개탄하였다.

 

나는 그 노승으로부터 사라진 십자가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사하촌(寺下村)에 사는 도적이 은제 십자가를 훔쳐 화력 좋은 불로 녹여서 은값으로 팔아 주막에서 술 사먹었다는 것이었다. 승려는 인욕을 하여 욕설을 해서는 안되는데, 그날 나는 허공에 대고 욕설을 퍼붓고 말았다. "천하에 무식한 놈 같으니!“

 

사명대사가 가져온 십자가는 한국천주교의 보물일 것이었다. 나는 사명대사가 가져온 십자가를 통해 한국불교와 한국천주교는 소중한 인연을 세세생생 다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무식한 자의 절도로 그 은제 십자가는 불에 녹여 은값으로 팔렸고, 주막에서 막걸리 값으로 사라져버렸다 한다. 은제 십자가를 보고 천주교의 교리를 듣고 신기해 하고 자신의 유품으로 세상에 전하려는 서산대사는 물론, 십자가를 소중히 간직하여 스승과 조선에 전한 사명대사도 한없이 통석해 할 것 같다. ◇

 

이법철(이법철의 논단/www.bubchu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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