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대암의 전설

法徹 | 입력 : 2004/06/06 [12:01]





원한을 풀고 함께 살아야





지장보살(地藏菩薩)은 유주무주(有主無主)의 고혼들을 지옥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성인이다. 지장보살을 청하여 공양을 올리고 기원하는 지장청(地藏請)을 보면, 지장보살의 얼굴은 만월(滿月)과 같이 둥글고, 청정한 두 눈에 손바닥에는 언제나 둥근 마니주(摩尼珠)가 있는데 그 빛은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인다고 하였다. ‘지옥중생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구제할 때까지는 성불하지 않고 보살도를 행하겠다’는 대비대원(大悲大願)을 세운 지장보살을 두고 대성대자(大聖大慈)의 보살이라고 하기도 한다. 지장보살은 염왕전상(閻王殿上)에 있는 업경대(業鏡臺) 앞에서, 또는 지옥문전 앞에 서서 마지막까지 중생이 탐욕으로부터 회심(回心)하여 부처님께 귀의하기를 권한다고 한다. 그러나, 중생은 그때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지장보살의 법문을 외면하고 곧장 지옥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지옥으로 들어가는 중생을 안타까이 보면서 지장보살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고 한다.

보개산(寶蓋山)의 정상인 환희봉 쪽의 맑은 샘 속에는 언제, 누가 조성하였는지의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지장보살의 석상(石像)이 있었다. 그 석상은 아무도 찾아 공양 올리는 사람이 없었다. 눈이오나, 비가 오나, 눈비를 맞으면서 지장보살상은 언제나 자비의 미소를 머금으면서 인연 있는 중생을 기다리면서 쓸쓸히 서 있었다.

신라 문무왕 때의 이야기이다.
보개산(寶蓋山) 중턱에 해묵은 돌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해에도 돌배나무는 싱싱하고 먹음직스러운 배가 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어디선지 숫까마귀 한 마리가 짝을 찾아 까악 까악 울고 다니다가 하필이면 돌배가 주렁주렁 열려서 축 처진 가지에 날아와 앉았다. 숫까마귀는 배나무 가지에 앉아 요란스럽게 까악 까악 소리를 내지르며 주변을 시끄럽게 했다.
그 까마귀가 시끄럽게 할 때, 배나무 아래의 풀밭에서는 먹이를 잔뜩 잡아먹은 큰 독사 한 마리가 쉬고 있었다. 독사는 조용히 똬리를 틀고 식곤증에 의해 맛있는 오수(午睡)를 즐기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 위가 시끄러워지자 독사는 짜증이 나고, 부아가 치밀었다. 독사는 고개를 들고 혀를 날름거리면서 머리 위의 시끄럽게 구는 까마귀를 노려보고는 이렇게 생각했다.
‘저 자식은 아주 무례한 놈이구먼. 제 짝만 찾으려고 악을 써대는데, 조용한 시간을 가지려는 나는 안중에도 없어. 세상에는 저런 이기주의자 때문에 살맛이 없어진다니까! 올라가서 다시는 무례한 짓을 못하게 주둥이를 콱 물어 버릴까?’
까마귀는 독사의 심정을 전연 모른 채 오직 짝을 소리쳐 불러도 응답이 없는 암까마귀에 대해 큰 실망을 했다. 이윽고 까마귀는 제혼자 부아가 치밀어서 신경질적으로 앉았던 배나무 가지를 발로 힘껏 차면서 날아 올랐다가 다시 앉았, 하기를 수회 반복했다. 그 바람에 배나무 가지에서 배 한 개가 뚝 떨어져 고속으로 급강하를 했다. 급강하한 배는 공교롭게도 풀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고개를 쳐들고 까마귀를 노려보는 독사의 대가리에 정통으로 맞고 말았다. 독사는 어이없게도 뇌진탕을 일으키어 황천으로 가는 딱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

독사는 잠시 혼절하다시피 쓰러졌다가 가까스로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렸다. 독사는 생전처음 눈에 불을 켜고 불같이 노하여 혼자 말했다.
‘저 놈이 전생에 나하고 무슨 원수일까? 나를 고의적으로 죽이려 들어! 저 못된 놈을 두고 나 혼자 죽어서는 억울하지. 나는 기필코 복수하겠어!’
독사는 머리가 빙빙 도는 가운데도 불같이 노하여 복수의 일념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나무를 감아 돌아 올라 수까마귀를 향했다. 숫까마귀는 이런 사정은 까마득히 모른 채 응답 없는 짝에 대해서 상심한 가운데, 이번에는 배나무 가지에 앉아서 부리로 깃털을 고르며 쉬고 있었다. 까마귀는 독사의 접근을 상상도 못한 채 정신 없이 깃털을 고르다가 갑자기 독사에게 몸을 물리고야 말았다. 독사는 혼신의 힘을 다해 까마귀를 물고 전신에 있는 독액을 모두 쏟아 부었다. 독사의 독액이 까마귀의 체내에서 맴돌자 까마귀는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고 의아하고 원한에 찬 눈빛으로 독사를 보면서 힘겹게 말했다.
“내 일찍이 너와 원한이 없거늘 어찌하여 나를 기습하여 죽이려 드느냐?”
기진맥진한 독사도 힘겹게 말했다.
“나는 굶은 지 오랜만에 식사를 해서 포만감에 잠시 조용히 쉬려 했는데, 네놈이 돌배를 내 머리에 떨어뜨려 나는 뇌진탕을 일으키었다. 나야말로 네놈에게 원한이 없는데, 어찌하여 나를 죽게 만드는 것이냐?”
독사도 죽어가고 있었다. 돌배로 너무 세게 머리를 맞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체내의 독액 까지 탕진한 상태인지라 기진맥진한 상태로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 때, 죽어가든 까마귀는 원한에 찬 복수의 일념으로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하여 부리로 독사의 대가리를 힘껏 찍어 나무 밑으로 추락시켜 버렸다. 그리고 까마귀도 나무에서 추락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까마귀와 독사는 땅에 추락하여 죽어가면서 서로 욕설을 퍼부었다.
‘원수 놈!’
‘원수 놈!’
까마귀와 독사는 서로 상대방을 해치려는 아무런 저의도 없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둘은 서로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원한을 품은 채 죽어가고 말았다.

까마귀와 독사는 똑같이 배나무 밑에서 죽어 육신은 배나무의 비료가 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두 영혼은 안식하지 못했다. 영혼끼리 서로 다투고, 생사의 결투를 하였다. 윤회를 초월하고, 생사를 자유자재로 하는 깨달은 영(靈)이 못되는 까마귀와 독사는 업보에 의한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독사의 영혼은 원한 속에 엉엉 울면서 산 속을 헤매다가 교미를 붙는 산돼지의 자궁 속에 들어가 산돼지로 환생하였다. 까마귀의 영혼도 원한 속에 엉엉 울다가 까투리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 까투리로 환생하였다.

일년이 흘렀다. 어느 날, 독사의 환생인 산돼지가 먹이를 찾아 이 산마루에서 저 산언덕으로 허기진 배를 안고 꿀꿀거리며 헤매고 다니고 있었다. 산돼지는 우연히 전생에 악연이 있는 그 까투리를 먼저 발견하게 되었다. 까투리는 양지바른 작은 솔 나무 밑에서 알을 품고 있었다. 산돼지는 알을 품고 있는 그 까투리를 발견하고는 전생의 악연이 여름날의 뭉개 구름처럼 피워 올랐다. 산돼지는 자신도 모르게 적개심이 일어났다. 혼자 욕설을 퍼부었다.
‘아니, 저놈은 그 때의 까마귀가 아닌가! 흥! 까투리의 탈을 쓰고 다니면 내가 모를 줄 알고? 저 놈을 꼭 죽여 원한을 풀어야겠어!’
산돼지는 복수의 일념으로 살며시 까투리가 알을 품고 있는 곳의 위쪽으로 올라갔다. 까투리가 있는 곳으로 큰 바위를 주둥이로 힘껏 밀어내려 보낼 심산이었다. 산돼지가 굴린 바위는 굉음을 내면서 까투리 쪽으로 고속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까투리는 산돼지의 복수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다. 오직 알만 품고 있다가 졸지에 바위가 덮쳐 그 자리에서 유혈이 낭자한 가운데 즉사하고 말았다.
산돼지는 까투리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통쾌한 마음에 주둥이를 하늘로 들어 골짜기가 떠나가라 앙천대소(仰天大笑)를 터뜨렸다. 그리고 무섭게 눈을 빛내며 이렇게 혼자 말했다.
‘흐흐흐…. 어디 또 다른 짐승으로 환생을 해보시지. 다음에는 무엇으로 변할 테냐? 네놈이 무엇으로 환생한들 네가 기어이 죽여 줄 테니까!’

갑자기 죽음을 당한 까투리의 영혼은 비로소 전생의 독사가 산돼지가 되어서 자신을 죽인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까투리는 엉엉 울면서 원한에 찬 목소리로 복수를 부르짖었다.
산돼지는 흔쾌한 마음으로 콧노래로 꿀꿀거리면서 다른 산등성이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그 때, 그 산기슭에 사는 사냥꾼 마씨(馬氏)가 사냥을 나왔다가 바위에 치여 피 흘리며 죽은 까투리를 발견했다. 그는 길가다 횡재한 듯이 반색을 하고는 까투리를 집어들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첩첩 산중에 사람이 들어왔을 리가 없는데…? 더구나 사람이 잡은 까투리라면 주워갔을 텐데…? 누가 죽이고만 갔을까?
사냥꾼은 횡재한 마음으로 그 까투리를 주워들고서 황급히 자신의 오막살이집으로 곧장 내려갔다. 요사이 젊은 아내인 순이(順伊)는 고기가 먹고 싶다고 졸라대던 터였다. 사냥이 안되어서 초조한 마음이었다. 마씨는 사립문을 열자마자 호기롭게 아내를 불렀다.
“여보, 당신이 바라는 고기가 왔소.”
아내는 남편이 들고 온 까투리를 보고서는 반색을 하고 달려와서 까투리를 받았다. 남편은 허풍을 쳤다.
“아 글쎄 이 까투리란 놈이 알을 품고 있는 게 눈에 띄지 않겠어. 고기 먹고 싶다는 당신 생각에 돌을 집어서 던졌더니 정통으로 까투리에게 맞아서 잡아 왔다네.”
“그런데 알은 왜 안 가져왔어요?”
“돌에 다 깨져 버렸어. 까투리가 살이 토실토실 쪘지? 볶아서 우리 둘이 싫건 먹어 보세.”
부부가 맛있게 까투리의 고기로 배를 채울 때, 졸지에 육신을 잃은 까투리의 영혼이 엉엉 울면서 죽은 육신을 따라서 온 것을 두 부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 날 밤, 까투리의 고기를 푸짐하게 먹은 부부는 오랜만에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그 때, 까투리의 영혼은 사랑을 나누는 부부 옆에서 울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사랑을 나누는 순이의 자궁 속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순이는 시집 온 지 삼 년이 넘었건만 아직 태기가 없었다. 그러나, 그 날로부터 태기가 있었다. 그 후, 순이는 달이 차서 아이를 낳았다. 사내 아이였다. 부부의 기쁨은 형언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두 내외는 귀하게 얻은 아들의 이름을 마치(馬雉)라고 지어주었다. 까투리 고기를 먹고 사랑을 나누어서 생긴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부부는 아들을 금이야, 옥이야,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길렀다.

유수같은 세월은 흘렀다. 마치는 무럭무럭 자라더니 열다섯의 건강하고 씩씩한 소년이 되었다.
마치는 소년 때부터 글공부보다는 사냥꾼인 아버지를 졸라 활 쏘는 법을 배워 활을 잘 쏘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버지보다 더 실력이 좋은 사냥꾼이 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와 아들은 각기 어깨에 활을 메고 첫 사냥에 나섰다. 아버지가 첫 사냥의 목표를 발견하고 목표물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면서 소곤거리듯 아들에게 말했다.
“치야, 네가 쏘아라.”
“뭔데요, 아버지?”
“저기 저 나무 밑에 까투리가 보이지?”
“알겠어요. 그러나 저는 까투리는 안 쏠래요.”
“아아니? 왜 안 쏘겠다는 것이냐?”
“다른 짐승은 쏘아도 까투리는 쏘고 싶지 않네요. 불쌍한 생각이 들어요.”
“너, 까투리를 볶아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 줄 아니?”
“싫어요! 까투리는 죽이지 않을래요! 다른 짐승을 쏘겠어요.”
“무슨 짐승을 쏘겠다는 것이냐?”
“산돼지요.”
“뭐 산돼지만 쏘겠다구?”
“저는 보개산에 있는 산돼지는 모조리 쏘아 잡고 말겠어요!”
너는 왜 산돼지만 쏘겠다는 것이냐?”
“괜히 산돼지만 쏘고 싶은 걸요. 아버지, 산돼지를 보시면 쏘지 마시고, 제게 먼저 알려 주세요. 제가 꼭 쏘아서 잡고 싶으니까요!”
아버지가 아들을 건네 보니 아들은 두 손에 활쏘기 준비를 마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산돼지를 찾았다. 아들의 두 눈에는 전에 볼 수 없었든 적개심의 불이 이글이글거리는 것을 보고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부자가 사냥을 하느라고 종일 보개산을 헤매고 있을 무렵이었다. 아들이 숲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재빨리 활에 화살을 재면서 아버지에게 나직이 말했다.
“아버지! 산돼지 새끼가 있어요. 제가 쏘겠어요!”
마치는 힘껏 화살을 숲 속으로 날렸다. 숲 속에서 산돼지 새끼의 비명이 울렸다. 화살은 산돼지 새끼의 정수리에 명중하였다. 산돼지 새끼는 고통에 몸부림을 치면서 ‘엄마’를 부르다가 피를 흘리면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마치는 산돼지 새끼의 시체를 내려다보면서 허겁지겁 아버지를 불렀다. 기뻐서 환호하면서 춤을 추듯 했다. 마치가 기뻐할 때, 산 위 바위 옆에 몸을 숨긴 어미 산돼지는 숨을 죽이며 슬픔과 원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아, 불구대천의 원수인 까마귀가 이번에는 인간의 탈을 쓰고 화살로써 나와 가족을 몰살시키려고 하는구나! 이를 어찌 할까? 저놈을 어떻게 복수를 할까! 아아!….’

그 후, 마치는 점점 장성해갈 수록 산돼지를 증오하고 산돼지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씨는 우연히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로서 자리보전을 하더니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아들에게 사냥연장을 모두 물려주면서 어머니에게 효도를 하라고 당부하고 세상을 떠났다. 마치는 소년기에서 이제 어엿한 청년기에 접어들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사냥도구로 매일이다시피 산돼지 사냥을 다녔다. 어느 날, 마치는 산돼지 한 마리를 잡아 마당에 놓고는 평상에 앉아 잠시 쉬려는데 사립문 쪽에서 목탁소리와 함께 낭랑한 염불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보는 노승이 등에는 바랑을 매고서 탁발을 나와 있었다. 마치가 합장하여 노승에게 인사를 하는데 노승은 인자한 미소 속에 마당에 죽어있는 산돼지를 힐끗 보고는 마치에게 달래듯 말했다.
“이제 전생의 악연은 종지부를 찍는 것이 좋지 않은가? 원한은 끝없는 원한을 낳는 법이라네. 인생은 짧아 아름답고 소중한 시간을 가져도 억겁의 시간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것인데 서로를 죽이고 죽는 원한으로 윤회를 거듭해서야 되겠는가?”
노승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마치에게 노승은 먼 옛날의 서로의 원한의 시작인 까마귀와 독사의 원한이야기, 까투리와 산돼지의 원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전생의 악연을 깨우쳐 주고 말했다.
“이제 원한의 마음에서 회심하게. 오늘은 자네가 활을 쏘아 죽이는 입장이지만, 다음은 반대로 자네가 화살을 맞아 죽는 신세가 된다네. 먼저 참회의 마음을 가져야 하네. 이곳 보개산에는 지장보살님의 도량이라네. 자네는 이제 원한의 살륙을 그치고, 지장보살님을 찾아서 참회하시게. 새로운 각오로 새출발을 하라는 말일세. 지옥중생을 하나도 남김없이 구제할 때까지 자신의 성불은 미루고, 중생구제를 위해 보살도를 실천하겠다는 지장보살님의 대원을 본받으시라는 말일세. 자네가 그 대원을 본받을 때, 자네의 그동안의 죄업은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오직 극락의 기쁨만이 있을 것일세. 알겠는가? 그러나, 지장보살님의 대원을 본받지 않는다면, 지신이 지은 업보로 살아서는 원한의 복수로 세세생생 죽고 죽이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죽어서 그 영혼은 영원히 나올 수 없다는 지옥 가운데 가장 무서운 무간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될 걸세.
노승은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하면서 사라졌다.

마치는 노승의 깨우침을 듣고 어둠속에 광명을 본듯 느낌이 왔지만, 전생의 오랜 훈습은 다시 그의 마음을 장악하여 다시 어둡게 만들어 버렸다. 지장보살님을 찾아 진심으로 회심해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마치는 어느 날, 또 보개산으로 사냥을 나갔다. 산돼지를 잡으려는 일념으로 온 산을 헤매는 그의 시야에 전에 보지 못한 해묵은 산돼지 한 마리가 들어왔다. 산돼지는 주둥이로 땅속에 묻힌 칡뿌리를 정신 없이 캐 먹고 있었다. 마치는 드디어 쏘아 죽여야 할 대상을 발견한 것이다. 마치는 눈에 불을 켜듯 무섭게 산돼지를 노려보면서 산돼지의 목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하여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바람을 가르면서 정확히 산돼지의 목에 파고들었다. 입안에 가득히 칡뿌리를 씹던 산돼지는 불의의 기습에 산악이 떠나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피를 줄줄 흘리면서 정신 없이 보개산의 정상인 환희봉(歡喜峰) 쪽으로 도망을 쳤다. 마치는 급소에 화살을 맞고도 달아나는 산돼지를 있는 힘을 다해 뒤쫓으며 속으로 경탄했다.
‘아앗…? 저놈이 그냥…? 대단한 놈이야!’
산돼지는 환희봉 아래에서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 놈이 어디로 숨었지? 숨이 끊어졌을 텐 데….’
마치는 사냥꾼의 본능으로 산돼지가 숨었음직한 곳에 이르러보니 거기에는 뜻밖에 이상하게도 지장보살의 석상이 맑은 샘물 속에 하체는 물에 담그고, 상체는 물 밖으로 내밀고 서 있는 것이었다. 마치는 지장보살상을 자세히 보고 대경실색했다. 놀랍게도 자비의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 지장보살상의 어깨에는 마치의 화살이 박혀 있었다. 마치는 기이한 현상에 놀라운 가슴으로 지장보살상의 어깨에서 화살을 뽑고, 활과 화살을 땅바닥에 내던지고 지장보살상을 향해 엎드려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큰절을 무수히 올렸다. 그 때 마치의 등뒤에서 목탁소리와 함께 염불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전일에 만나 깨우침을 주었든 노승이었다. 노승은 마치에게 말했다.
“보개산의 지장보살님이 자네의 화살을 맞으면서까지 자네를 끝이 보이지 않는 원한의 복수에서 해탈하게 하시려는 대자대비의 뜻을 알겠는가?”
마치는 비로소 노승이 깨우쳐 준 전생의 이야기를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참회의 눈물 속에 지장보살상 앞에 무릎꿇고 합장하여 서원을 올렸다.
“지장보살님, 저의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제해 주시려고 이와 같은 기적을 보여주셨음을 믿고 깊이 감사 드리옵니다. 저는 이제부터 활과 화살을 영원히 버리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서 몸과 마음을 바쳐 지장보살님의 대원을 본받는 도를 닦고자 하옵니다. 가르침을 주옵소서.”
그 때, 노승은 등뒤에서 다시 말했다.
“자네와 원한이 있는 그 산돼지도 지장보살님의 대자대비에 교화되었다네. 10년 후에는 소년으로서 자네를 찾아 이곳에 올 걸세.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가 되어서 보개산에 지장도량을 세워 말세중생의 복전을 만들어 주시게나. ”
마치가 돌아서 인사를 하려하니 노승은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 후, 마치는 승려가 되었다. 보개산의 지장보살상이 서 있는 곳에 토굴을 지어 석대암(石臺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오래지 않아 과연 노승이 예언한대로 소년이 찾아왔다. 소년은 전생의 산돼지의 환생인 듯 쉴새 없이 무언가 입안에서 씹으며 식탐을 하는 뚱뚱한 소년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반갑게 다정히 손을 잡고 지장보살상 앞에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었다.
마치를 회심시키어 불문에 귀의하게 한 노승은 보개산 산신령의 화신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어쨌든 석대암의 두 승려는 합심하여 지장보살상을 모시고 도를 닦으면서 지장보살의 대원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실천하는 승려가 되었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해원상생(解寃相生)이다. 일체중생이 모두 원한에서 벗어나 서로 함께 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계(人間界)뿐이 아니다. 귀신계(鬼神界)도 해원상생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인간계의 뿌리인 귀신계가 먼저 해원상생을 해야 하늘도 땅도 서로 돕는 상생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개인과, 가문과, 단체와, 국가간에도, 해원상생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분단된 남과 북도 해원상생이 이루어져야 전쟁이 없이 평화통일을 이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鐵原郡) 보개산에 있는 석대암(石臺庵)의 전설이다.




(2003년7월29일,12시20분, 치악산 기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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