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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사의 전설:이법철의 논단

계림사의 전설

法徹 | 입력 : 2004/06/06 [10:35]




승려가 죽어 사라지는 절





고려태조가 승하 한 다음날의 아침, 만조백관의 호곡소리가 대궐의 담을 넘어 송악산을 울려 퍼질 때, 어느 산사에는 연쇄적인 괴이한 사건으로 절망적인 공포의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절에 사는 승려들의 가슴에는 공포의 안개가 모락모락 피워 오르고,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공포에 속수무책으로 우왕좌왕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도축장에서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소, 돼지 등 축생처럼 그들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세상은 천지의 정기(正氣)가 고려의 강산에 두루 펼 처지지 못하여 인적이 끊긴 심산유곡에는 사기(邪氣)로 형성되는 온갖 잡귀들(雜鬼)과 정령(精靈)들이 인간을 미워하여 인간의 마음에 허점이 보이면 즉각 둔갑의 조화를 부려 인간을 해코치려 들었다. 이러한 잡귀들과 정령들의 사악한 행위를 막기 위해 천지의 정기를 받은 승려와 도사를 포함한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은 분연히 나서서 신명을 바쳐 인간을 지키면서 천지의 정기를 세상에 바로 세우고자 하였다.
기인이사들의 말에 의하면 나무에는 근본인 뿌리가 중요하듯이 인간세계가 잘되려면, 무엇보다 인간세계의 근본인 신명계(神明界)가 정기로 충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시말해 신명계가 상생화합의 기운이 성할 때는 인간세상이 살만한 세상이 되고, 반대로 상생화합이 안되고 원한과 증오가 치성할 때, 인간세상은 고해바다라는 것이다.

그 날, 그 절의 대중 방에는 대중공양을 마치고 난 뒤, 모두 그 자리에 앉아서 그 절의 방장(方丈= 그 절의 선 수행의 스승)스님은 주지 이하 승려들과 공포에 내심 떨면서 대중공사(대중회의)를 시작하고 있었다.
방장스님은 땅이 꺼지게 장탄식을 하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중을 향해 말했다.
“어제 밤에도 또, 승려가 실종되었다는 보고가 있었오. 거듭되는 불행을 어찌해야 해결하는 지…. 의견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대중의 얼굴에는 공포와 참담한 빛으로 가득해졌다. 절집의 법도에는 개구(開口)를 하는 것도 찬물 마실 때, 위아래가 있듯이 질서가 있는 법이다. 아랫 승려들은 방장스님의 아래 서열인 주지스님을 힐끗 보면서 침을 삼키며 기다렸다. 주지스님은 대중을 돌아 대가리 숫자를 세는 듯 하더니 공포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들은 달리 지혜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
모든 승려들이 더욱 겁을 먹은 표정으로 다투어 탄식을 토했다. 방장스님은 다시 말했다.
  “이 절은 고려 태조대왕 이전부터 창건된 유서 깊은 대찰로서 그동안 이 백 명에 가까운 승려들이 서로 화합하면서 평화롭게 살아왔오. 그런데 1년 전, 납월팔일(臘月八日), 즉 성도일 직후 밤부터 승려가 한 명씩 일주일 간격으로 원인 모르게 실종되고 있소. 이것은 분명히 요괴의 짓이 분명하오. 그동안 힘깨나 쓴다는 승려들이 밤에 잠을 자지 않고 몽둥이를 들고 순찰을 돌았지만, 여전히 승려는 실종되었고, 심지어는 순찰을 도는 승려들도 모두 실종되고 말았오.”
대중들은 겁먹은 얼굴로 묵묵부답이었다. 방장스님은 이어서 말했다.
“유서 깊은 절에서 상상할 수 없는 괴변이 벌어지니 겁 많은 승려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소. 이제 남은 승려는 모두 열 명도 되지 않게 되었소. 남은 우리도 요괴에 당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소? 우리는 사건을 일으키는 요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어 대책을 세울 수가 없소.. 이제 우리의 능력은 한계에 달했으니, 마지막 방법을 써봅시다.”
대중은 희망의 눈빛으로 일제히 방장스님을 쳐다보았다. 방장스님은 단안을 내리듯 또박또박 말했다.
“ 천수천안의 관세음보살이 구해주지 않는 한 우리는 사찰과 함께 멸문지화를 피하지 못할 것 같소. 바라건대, 남아 있는 승려들은 모두 일심으로 관음기도를 지극지성으로 하여 관세음보살님의 계시와 가호를 기다려 봅시다.”
대중이 이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대중공사를 끝내는 죽비가 세 번 울렸다.

며칠 후, 해공(解空)이라는 20대 중반의 젊은 승려가 달빛이 아름다운 야반삼경에 몽둥이를 들고 멀리 떨어진 해우소를 찾는데, 가까운 숲 속에서 여자가 걸어 나오면서 목례를 했다. 검은 옷에 30대 중반의 여인이었다. 해공이 가까이 그녀의 자태를 보고 내심 감탄하여 속으로 말했다.
‘선녀가 하강했을까? 절세미인이군.’
절세미인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달빛속에 환상적으로 서 있었다. 해공은 몽둥이를 굳게 잡고서 거칠게 말했다.
“야심한 절에 웬 여자요?”
흑의의 미인은 교태롭게 웃으며 은근히 대답했다.
“저는 가까운 곳에 사는 대갓집의 청상과부예요. 달빛이 하도 좋아서 결례를 무릅쓰고 이곳까지 왔는데, 사찰이 있었군요. 수도하시는 분께 큰 결례를 범했네요. 고의가 아니니 자비로 용서해 주세요. 꾸짖으시니 곧 떠나겠어요.”
여자는 서서 단정히 앞에 두 손을 모우고 곱게 고개를 절하여 사과의 태도를 보였다. 예의범절이 있는 여자의 태도를 보고 해공은 부쩍 호감이 들었다. 그는 온화한 표정을 지어 은근히 말했다.
“청상과부? 안되었구려. 절세의 미인이신데….”
그녀는 쓸쓸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모두 제 팔자 소관이 아니겠어요?”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내생에는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그 때 그녀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은근히 말했다.
“스님, 제가 맛있는 음식을 집에서 조금 싸왔는데 드시겠어요? 대접하고 싶은데….”
“이 밤중에 무슨 대접….”
해공은 군침이 돌고 얼굴이 달라졌다. 그녀는 더욱 은근히 말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음식을 나눠 먹기로 해요, 네?”
“젊은 보살님이 공양을 올리겠다고 간청하는데 응하지 않으면, 어찌 자비의 승려라 하겠소? 여기는 남의 이목이 있으니 저 골짜기 위의 시냇가 바위 위에서 공양하실까?”
해공은‘자다가 떡 얻어먹는다’는 옛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야반삼경의 달빛아래 청상의 절세미인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된 것은 뜻밖의 행운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다른 승려들이 눈치챌까 싶어 더 깊은 골짜기로 가자고 제의했더니 그녀는 흔쾌히 승낙하고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짓고 음식 보따리를 들고서 뒤따른다. 으슥한 바위에 앉자 해공이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맛있는 음식이 뭐요?”

흑의의 미인은 해공 옆에 바짝 앉았다. 해공의 코에 남자를 유혹하는 향수 냄새가 진동하여 정신이 몽롱해졌다. 흑의의 미인은 교태를 부리면서 코맹맹이 소리로 은근히 말했다.
“미주가효(美酒佳肴)가 있지요.”
“뭐요? 나를 시험하는 거요? 젊은보살! 승려가 어찌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겠오?”
해공은 성깔을 부렸다. 흑의의 미인은 그러한 해공을 건네보며 깔깔 거리며 건네 보더니 해공의 손에 큰 술잔을 쥐어 주고 술잔에 술을 그득 따라 주고 말했다.
“저는 입이 무거운 여자에요”
해공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나직히 말했다.
“이러면 산문출송 당하는데….”
흑의의 미인은 자신의 술잔에도 술을 따루어 들고는 더욱 교태롭게 말했다.
“자, 우리, 건배해요. 마음놓고 한 잔 드세요. 수도하시느라고 고생이 많으시죠? 오늘은 곡차를 드시고 고생을 잠시 잊으세요. 그런데, 그 몽둥이는 왜 들고 있나요?”
“요괴를 때려잡을 꺼요.”
“어머나, 나 같은 요괴요?”;
그녀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해공은 벌쭉하게 웃으며 말했다.
“ 젊은보살 같은 절세미인은 아니지. 무섭게 흉악하게 생긴 요괴를 말하는 거요.”
그녀는 해공을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스님, 술맛 떨어지는 몽둥이는 버리세요!”
해공은 몽둥이를 멀리 던져 버리고 술잔을 들어 목에 쏟아 부었다. 그녀는 코맹맹이 소리로 재촉했다.
“자, 어서 연거퍼 곡차를 드세요. 스님들은 평소 곡차를 안마시지만, 마시기 시작하면 고래가 물마시듯 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술을 마실 기회가 적으니까.”
그녀는 해공의 술잔에 여거퍼 술을 따루었다.
그런데, 스님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깨달음은 얻으셨어요?”
“깨달음은 무슨 깨달음? 콧구멍이 왜 아래로 뚫렸는가는 깨달았지. 위로 뚫렸으면 빗물이 들어가지 않겠오?”
“저런, 시주 밥만 축내고 말았군요.”
“아까운 세월을 낭비한 거요!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님께 큰 불효를 했고, 스승인 부처님께 대죄를 짓고, 또 시주들에게 죄를 짓고 말았다니까! 이거 오랜만에 곡차를 마시니 확 올라오는구먼. 술이 다 떨어졌지? 아쉬운 일이야.”
“ 이제 보니 술고래시군요. 하지만 술 걱정은 마세요. 저의 집에는 인삼주, 더덕주, 송주, 매실주, 복분자주 등 갖가지 술이 많이 있어요. 저의 집으로 가실까요? 제가 오늘밤은 모시고 싶은데요. 저와 함께 맛있는 요리와 곡차를 드시고, 어두운 새벽에 절에 돌아오시어 태연히 방에서 경문을 읽고 있으면, 누가 밤에 외박한지 알겠어요? 자, 어서 일어나 저를 따라 오세요.”
“승려가 여자 꽁무니를 따라다니면 안되는 데….그나저나 젊은보살, 우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나는 법명이 해공이라 하오. 공에서 해탈했다는 뜻이지.”
“저는 옥나찰(玉羅刹)이라고 해요.”
“뭐? 나찰? 사람 잡아먹는다는 나찰? 무슨 이름이 그렇소? 무시무시하구먼.”
“별명이에요. 제가 불량한 여자 같아요?”
“아니지. 착한 절세미인이지. 달빛 좋은 야반삼경에 이렇게 인심 좋은 여인이 세상에 또 있겠오? 고독하고 가난한 승려들을 대접하는 걸 보면 천상에서 하강한 착한 선녀가 분명하오! 그나저나 나찰은 무섭게 느껴지니 당장 옥미인(玉美人)으로 별명을 바꾸시오. 알겠오?”

무엇이 그리 좋아 죽겠는지, 옥나찰은 깔깔거리며 앞장 서 걸었고, 해공은 술에 취해 정신 없이 헐떡거리며 뒤를 따랐다. 이윽고 해공의 눈앞에는 대소의 전각들이 늘어서 있는 입구의 거대한 솟을대문 앞에 섰다. 옥나찰은 대문을 활짝 열고서 해공을 데리고 들어가 별채의 방안에 안내했다. 해공은 방안에 앉아 화려한 방안의 주위를 살피면서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빙그레 웃다가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어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내가 부잣집 별당아씨를 꼬셨다고 몽둥이 찜질 당하는 거 아니오? ”
옥나찰은 섬섬옥수로 해공의 손을 잡으며 달래듯 다정하게 말했다.
“무엇을 걱정하세요? 제 집인데. 제가 상다리가 부러져라 맛있는 술상을 차려오겠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옥나찰은 해공을 방안에 두고 방문을 나서자 은은한 미소는 싹 사라졌다. 싸늘하고 인광이 번뜩이는 무서운 눈으로 변했다. 그녀는 어둠 속을 향해 자애로운 음성으로 불렀다.
“귀여운 내 새끼들아, 엄마가 너희들의 먹거리를 방에 가져다 놓았다. 형제간에 싸우지 말고, 모두 맛있게 먹거라!”
시커먼 무리들이 앞다투어 쏜살같이 방안으로 몰려갔다. 곧이어 해공의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순식간에 살이 점점이 찢겨져 먹히고, 뼈를 씹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려왔다.

그 날은 오전부터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큰산의 숲 속의 공터에서 허름한 옷을 입은 비에 흠벅 젖은 사내들 7명이 각기 손에 도끼, 검, 창, 철퇴를 들고서 한 사내를 포위하고서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은 늑대 떼들이 하나의 공격대상을 놓고서 원을 그리며 돌면서 상대의 약점이 보일 때 순식간에 공격하려는 그 모습과 흡사했다. 포위를 당한 사내는 나이는 젊은 사내로서 푸른 상의에 감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는 장검을 뽑아 들고 서서 포위한 사내들의 움직이는 모습을 두려워 하지 않는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는 산도적의 동패로 보이는 30대 중반의 여자가 포위한 동패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앙칼지게 동패를 향해 외쳤다.
“뭐하고 있는 거야? 비 오는데, 빨리 죽여 버리고 전대(錢袋)를 빼앗으란 말이야!”
그러나 겁을 먹지 않고 너무도 태연한 포위된 자의 기상을 보고서는 산적들은 망설이고 있었다. 포위된 자가 사납게 외쳤다.
“너희들 산적들인가?”
산적두목으로 보이는 털보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우리는 애초에 산적은 아니었지. 당당한 장졸이었다. 우리는 전쟁에 패배한 장군의 장졸들이야. 패배한 장졸들은 승자들이 노비로 만드는 것을 아는가? 우리는 노비가 싫어서 산에서 산다네.”
“그런 사연이 있었군. 단 한번 용서해줄 테니 돌아가라!”
산적들은 일제히 홍소를 터뜨렸다. 털보 두목이 웃으며 크게 말했다.
“그 놈, 뱃장 한번 좋구먼. 전대를 바치고 울며 무릎꿇고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해야 할 자가 우리를 용서해주겠다고?”
산적두목이 사납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너의 뱃장이 맘에 들어 전대를 바치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전대를 바치겠나?”
“모두 저승이 소원인 것 같은데 보내주지. 내 별호나 잘 외우고 죽어라. 죽어도 영광스럽게 죽어야하지 않겠나? 나는 고려 제일검(第一劍)이 되고자 하는 일도검객(一刀劍客)이다!”
산적들은 그가 살기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제히 다시 홍소를 떠뜨리었다. 홍소가 채 끝나기 전 산적들은 병장기를 휘두르며 달려들고, 전투는 시작되었다. 병장기 끼리 부딪칠 때마다 빗속에 불꽃이 번쩍번쩍 일어났다. 장대 비속에 검객은 장검을 들고 제비처럼 땅을 차고 날면서 현란하고 잔인한 검법으로 순식간에 산적들을 베고 찔러 쓰러뜨렸다. 산적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 피는 빗물에 섞여 냇물처럼 흘렀다. 마지막 남은 여자는 산적두목의 아내인 것 같았다. 죽어 가는 두목의 시체를 안고 울부짖더니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며 이를 갈면서 남편의 칼을 주워 잡고 검객에게 달려들었다. 검객은 피식 웃고는 단칼에 일도양단(一刀兩斷) 하려는 생각으로 자세를 취했다. 그 때, 빗속에서 신형이 날아와 우뚝 섰다. 백미(白眉)의 노승이 석장을 짚고 비속에 서서 두 사람을 쏘아보고 있었다. 백미의 노승은 뼈만 남았으나 위엄이 가득했다. 백미노승은 큰소리로 외쳤다.
“여보게 젊은이, 검을 거두시게! 그리고 젊은보살, 칼을 버리시오! 두 사람은 상대가 되지 못하는 걸 피차 잘 알면서 싸우려고 하고 있소. 젊은보살이 지아비를 잃은 상심과 분노에 칼을 들고 복수를 하려는 것은 이해하오. 그러나 젊은보살은 저 검객의 한 칼에 죽을 것이 뻔하오. 지금 젊은보살은 태중에 아이를 가진 것 같은데, 죽어서야 되겠오? 또, 임신부를 죽였다가는 젊은이는 고려 제일검은 커녕, 영원히 고려 무인의 수치의 표본이 되고 말 것이오. 즉각 검을 거두시오. 두 사람은 각기 병장기를 거두고 헤어지시오!”
여자는 칼을 버리고 배를 안고 울면서 빗속으로 사라졌다.

검객은 검을 칼집에 넣고 정중히 합장하여 노승에게 인사를 했다.
“선지식께서 저를 깨우치어 임신부를 죽인 검객이라는 천추의 오명을 받지 않게 하시었습니다. 선지식의 존성대명은 누구 신지요? 삼가 제자로서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 선재선재라. 한 마음 돌리면 지옥에서 극락인 것을…. 늙은 승려가 무슨 이름이 있겠오? 백미노승이라고만 기억해두시구려. 나도 급히 가봐야 하겠소. 가까운 사찰에서 정체불명의 요괴의 장난으로 승려들이 연쇄적으로 실종된다는 거요. 유서 깊은 사찰의 멸문지화를 막기 위해서 내가 빨리 가보아야 하겠소. 그럼, 후일 인연 있어 재회하기로 합시다.”
백미노승은 신형을 날려 빗속으로 사라졌다. 검객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노승의 뒤를 쫓아 빗속으로 뛰며 악을 썼다.
“요괴는 고려제일검인 제가 한칼에 베어 없애겠습니다. 동행하게 해주세요!”

그 절의 방장과 주지로부터 연쇄적인 승려의 실종을 이야기를 들은 백미노승은 변괴가 일어나는 산사를 주의 깊게 살피고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었다. 잠시후, 백미노승은 방장과 주지에게 이상한 요청을 하였다.
“내가 이 절의 멸문지화를 막아내겠소. 요괴를 찾아내어 처단하겠다는 말이오. 지금 당장 장터에 가서 흰닭(白鷄) 한 쌍을 사 가지고 와서 백계들이 좋아하는 먹이를 풍족하게 주면서 키우시오. 백계들이 마음껏 도량에 활보하도록 할 것이며, 백계가 종족을 번식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시오. 아시겠오?”
방장과 주지는 놀라운 얼굴로 이구동성으로 반문했다.
“팔만대장경을 다 읽어보아도 부처님 도량에 닭을 키어야 한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부처님 도량을 양계장으로 하시려고 하시려는지요?”
“사찰과 승려의 멸문지화를 피하겠소. 아니면, 멸문지화를 당하겠소?”
방장이 송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명대로 흰닭을 구해오겠습니다.”
백미노승은 다시 말했다.
“그리고, 닭에게 모이를 줄 때는 언제고 마치 사람에게 부탁하듯이 이렇게 말해주시오.
‘닭아 닭아 신령스러운 흰닭아! 부처님 도량을 지켜다오!’라고 아시겠오?”

기이한 풍경이 벌어졌다. 한국불교 사상 최초로 산사의 도량에 흰닭 두 마리가 활보하게 되었다. 닭이 모이를 먹을 때, 승려들은 닭에게 부처님 도량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암닭은 곧 알을 둥지에 낳기 시작하더니 이내 둥지에 앉아 알을 품었고, 곧이어 흰 병아리들이 어미를 따라 도량을 활보하기 시작했다. 닭의 숫자는 오래지 않아 수 십 마리로 불어났다.
어느 날, 닭에게 모이를 주는 승려가 백미노승에게 보고를 해왔다.
“이상한 일입니다. 수 십 마리의 닭들이 아침에 모이를 먹고서는 행방이 묘연해 졌다가 저녁에 모두 온몸에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백미노승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닭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
“법당 앞 도량에서 쉬고 있습니다.”
백미노승은 방장, 주지와 동행하여 닭들을 찾아가 보니 과연 온통 피투성이엇다. 마치 전쟁터에서 돌아온 것 장졸 같았다. 백미노승은 닭들에게 마치 사람에게 말하듯 위로의 말을 하였다.
“닭아, 신령스러운 흰닭아! 이제 너희들이 부처님을 위해서 싸우기 시작했구나. 참으로 고맙다. 어서 기운을 회복하여 마지막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다오! 너희들은 모두 인도환생의 공덕을 쌓기를 바란다!”
백미노승은 모든 승려들에게 닭에게 모이를 주면서 닭의 진정한 용기를 칭찬하게 했다.

그 때 도량에 일도검객이 장검을 들고 나타났다. 검객은 백미노승에게 달려와 합장하여 정중히 인사를 하고 말했다.
“저도 요괴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미력이나마 돕고자 합니다. 허락해 주세요. 제가 책임지고 저의 장검으로 요괴를 일도 양단하겠습니다!”
백미노승은 흔연히 반기었다.
“좋소. 요괴와의 결전은 모레 아침부터 시작할 것이오. 검객은 준비를 해주시고, 모든 승려들은 닭들이 기력을 찾을 수 있도록 먹이를 풍족하게 주시오. 모든 승려들도 나서야 할 것이오.”
그 날로부터 검객은 계곡의 암반 위에서 장검을 뽑아 뛰고 날면서 베고 찌르는 연습을 하였다. 검객이 검술을 연마할 때, 숲 속에서는 옥나찰이 숨어서 검객을 보며 은은하게 웃고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미주가효가 들려 있었다. 옥나찰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독백했다."이 세상에 주색을 초월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마침내 결전의 날이 왔다. 백미노승은 닭에게 모이를 풍족하게 주면서 마치 제갈공명이 장졸에게 출사표를 읽어주듯, 닭들에게 싸워 이겨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해주었다. 특히 장닭들은 다투어 양 날개를 치면서 목을 빼어 길게 호령하듯 울어대었다. 드디어 닭들이 소리를 지르며 떼지어 달렸다 그 뒤에 모든 승려들이 몽둥이, 괭이, 낫 등을 들고 뒤를 따랐다. 백미노승은 검객을 소리쳐 찾았으나 웬지 검객은 보이지 않았다.
닭들이 소리를 지르며 몰려가는 곳은 절에서 가까운 숲속의 자갈과 바위 돌들이 수북히 쌓인 암굴(岩窟)속이었다. 닭들은 어두운 암굴 속으로 다투어 들어갔다.

승려들이 닭들의 뒤를 따라 동굴에 들어가니 장닭들은 검은 옷을 입은 절세의 미인에게 날개를 퍼득여 날아 오르며 발로 차고 부리로 무섭게 쪼았다. 암닭들은 수 십 년 묵은 지네들과 싸우고 있었다. 옥나찰의 입에는 방금 인간의 고기를 식사를 해서인지 입가에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백미노승은 굴 바닥에 방금 해체된 뼈무더기 옆에 검객의 장검이 뒹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고려의 제일검이 되겠다는 검객이 절세미인의 미인계에 스스로 목숨을 바치고 만 것이다.

승려들이 굴속을 자세히 보니 인간의 해골과 뼈다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승려들은, 그동안 승려들을 실종시킨 원흉이 천년 묵은 암지네였다는 것을 확연히 깨달았다. 젊은 승려들은 분기탱천하여 용맹한 흰닭을 도와 옥나찰을 때려잡았다. 옥나찰은 죽어가면서 한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귀여운 내 새끼들하고 천년만년 행복하게 살려고 했는데….”
옥나찰이 죽고나니 지네의 본신이 드러났다. 거대한 암지네였다. 옥나찰의 새끼들은 모두 닭들에게 죽고 말았다. 닭들은 발로 자갈을 파헤치면서 까지 지네새끼들을 철저히 말살시키고서는 지쳐서 일제히 죽고 말았다. 백미노승은 젊은 승려들에게 죽은 닭과 인간의 유골들을 모두 굴 밖으로 내온 후, 굴속에 불을 지르게 하였다. 잠시 후 굴속은 불바다가 되었다. 죽은 지네든 산 지네든 흔적조차 없이 맹렬한 불 속에 사라져 버렸다.

백미노승은 암지네에게 죽은 인간들과 흰닭의 영혼을 천도하고, 법상에 올라서 주장자로 법상을 치면서 천도법문으로 이렇게 말했다.
“고금을 통해 부처님을 대신하는 승려들이 부처님의 팔정도의 정신으로 수행정진하지 않고, 중생을 자비로써 구원하지 않으며, 오히려 중생을 기만하여 재물이나 탐하면, 사찰에 변괴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바꿔 말해 정기(正氣)가 쇠하면 반대로 사기(邪氣)가 득세하여 침범하는 것이다. 그 때에 이르러서는 인간을 해치는 잡귀들과 정령들이 조화를 부리어 부처님의 도량을 복마전(伏魔殿)으로 만들려고 획책하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마강법약(魔强法弱)시대가 열린다는 것이다. 시회대중이여, 무엇보다 그대들의 마음을 청정히 하라!”

백미노승은 이어서 말했다.
“그동안 승려들이 실종된 원인은 무엇보다 여색에 대한 음욕, 즉 색경계(色境界)를 초탈하지 못한 탓이다. 야반삼경에 사찰에 나타난 미인에게 수행승려라는 자들은 초심의 본분을 망각하고, 미인계에 취하여 미인의 인도에 스스로 지네굴속에 들어가 지네들의 밥이 된 것이다.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고려의 제일검이 되겠다는 검객도 검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색경계에 초탈하지 못해 죽음을 자초했으니 이 세상에 색경계만큼 어려운 경계가 달리 또 있겠는가? 깨달을 지어다!”
백미노승은 주장자로 법상을 치면서 다시 말했다.
“이제부터라도 그동안 이 절에서 비명횡사를 한 자나 살아 있는 자들도 부처님께 진실로 참회하고 부끄러워 해야 하고, 새로이 출발해야 할 것이다. 장차 이 사찰은 신명을 던져 지네를 물리친 의로운 흰 닭들의 영혼을 천도하고, 기리는 마음에서 작은 영탑을 세우라. 그리고 이제부터 이 절의 이름을 계림사(鷄林寺)로 명명하여 후세의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음날, 방장스님과 주지스님이 백미노승의 처소인 방문을 열었을 때, 백미노승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그 날, 사찰의 멸문지화를 면하게 한 백미노승을 두고, 후세인은 관음보살의 32응신의 하나인 화신(化身)이라는 설도 전해오고 있다.
이 이야기는 황해도 장연군에 있는 계림사의 전설로써,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쳐 사찰내에서 주색에 대한 경계를 가르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2003년7월22일새벽2시20분,치악산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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