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묵조사

法徹 | 입력 : 2004/05/29 [14:41]







진묵조사( 震默祖師 )





  해남, 두륜산 대흥사의 남쪽 산기슭에 자리한 일지암(一枝庵)에서 초의의순(草衣意恂)스님이 불가의 다도를 중흥시키며, 문장가로써 이름을 떨치면서 천하의 재사들을 사귀든 무렵이었다. 진달래꽃이 무수히 피워가는 화창한 어느 봄 날, 젊은 유생 한 사람이 초의선사를 찾아왔다. 젊은 유생은  손에 작은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초의선사는 일지암을 찾는 승속 모두에게 언제나 화기애애한 미소로써 영접하듯, 그 유생을 다실(茶室)로 안내하여 따뜻한 차를 대접하였다. 유생은 초의선사에게 큰절로 정중히 예를 표하고, 어눌한 말투로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전북 김제에 사는 유생이며, 성명은 김기종(金箕鍾)이라고 합니다.사람들은 저를 은고거사(隱皐居士) 라고도 부르지요.”
  초의선사는 미소속에 유생의 차잔에 따뜻한 차를 부어주면서 물었다.
  “멀리서 어찌 나를 찾아오시었소?”
   “제가 존경하는 조사스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오래전에 열반에 드시었지만, 그 분의 덕행과 수행과 이적(異蹟) 등은 구전으로나마 세상에 전해 오고 있지요. 그러나, 세상에 널리 그 분에 대해 알리고져 한다면 구전이 아닌 문집(文集)을 제작하고져 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저는 그분에 대한 사상을 문장으로 만들기는 능력이 부족하고, 특히 불교를 잘 깨닫지 못하여서 외람되나마 초의큰스님께서 문집을 만들어 주십사, 하고 그 조사님이 남긴 시문과 일화를 수집해왔습니다.”
 초의선사의 눈에 호감의 빛이 감돌았다. 유생이 불문의 스님을 존경하여 문집을 만들어 세상에 유포하려는 그의 정성이 가득 마음에 들었다. 초의선사는 잔잔한 미소속에 말했다.
 “그 조사스님이 누구시오?”
 “진묵조사입니다. 전주지방에서는 불문에 큰스님이면서 어머님에 대한 지극한 효심으로 중생들의 입으로 만고의 효자로 전해오는 분이지요.”
  “나도 그분의 효심에 대한 일화를 전해들어 알고 있소. 나는 중노릇 하다보니 불효를 하고 말았소. 그것이 나는 죽어서도 한으로 남을 것이오. 인간이 못되는 사람이 어찌 중생의 스승인 부처가 될 수 있겠소? 진묵조사는 인간의 도리를 휼륭히 하신분이요. 암, 휼륭한 스님이시지.”
초의선사는 말을 이었다
.  “진묵조사에게도 제자들이 있었을 터인데 수백년이 흐른 오늘까지 ‘진묵조사 행장기(震默祖師行狀記)’를 만들어 세상에 전하지 못하고 있소. 그런데 승려가 아닌  유생인 김공(金公)이 그 소임을 도맡으려 하니 같은 승려로써 대견스럽고 감사하기 이를 데 없소. 분명 진묵조사님과 김공은 숙연이 깊은 사이일 것이오. 김공이 그렇게 원력을 세우는데 항차 후학이요, 승려인 내가 어찌 그 일을 돕지 않겠소.”

 김기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초의산사에게 새삼 삼배의 큰절을 올리면서 감사의 인사를 올리었다.이윽고 김기종은 자신이 들고 온 보따리를 풀었다. 그는 자신이 다년간 수집한 진묵조사의 일화를 적은 원고를 초의선사에게 바쳤다. 일화는 조잡한 문장으로서 하나도 완성되지 못한 초고에 불과하였다. 초의선사는 흔연히 원고를 받고서는 손님에게 숙소를 정해주어 쉬도록 하고, 자신은 자신의 산방에서 밤을 새워 건네 받은 진묵조사의 일화를 독파해 마치고, 깊은 묵상에 잠겼다. 묵상 속에서 초의선사는 진묵조사가 되고, 진묵조사는 초의선사가 되어 살활자재(殺活自在)하였다. 초의선사는 떠나온 노모를 생각하였다. 진묵조사처럼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뜨거운 눈물로 양볼을 적시었다. 초의선사는 묵상에서 깨어났다. 승려로서 만고의 효자인 진묵조사를 위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결단을 내렸다. 무엇보다 출가하여 승려가 된 후, 할애사친(割愛辭親)해야 한다는 불문의 규칙 때문에 승려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는 만고의 불효를 자행하는 일부 승려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초의선사는 스스로 먹을 갈아 붓에 듬뿍 묻히고 하얀 종이 위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다음과 같이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진묵조사유적고서(震默祖師遺蹟攷序)

  世典曰, 苦莫苦於多願. 多願之苦, 莫如佛也. 如藥師如來, 修菩薩行時, 發十二上願. 阿彌陀佛, 爲法藏比丘時, 發四十八大願. 釋迦如來, 爲寶海梵志時, 發五百誓願. 彌陀之願, 三倍於藥師. 釋迦之願, 百倍於彌陀者, 又四矣. 其 願之苦行, 尤爲廣博卓然逈出於二佛之上者. 苦已遠矣. 然, 世願之苦, 苦苦苦而去苦, 求樂苦不去, 而樂不來, 佛願之苦, 處苦而行苦, 忘樂苦自去, 而樂自來. 此世出世願之所以異感於苦樂者也. 凡此諸願, 皆博施濟衆之弘誓也. 故其成佛之後, 例皆不住本位, 隨緣現化於衆生界中. 如西天維摩居士, 現化於毘耶離城, 卽 金粟如來後身也. 金陵寶誌禪師, 降化於齊梁之世, 是觀音佛之應身也. 雙林善慧大士, 降化於蕭梁之世, 卽彌勒佛之應身也. 我東國震默大師, 降化於 明朝之世, 卽 釋迦如來應身也. 師法諱一玉. 震默其自號也. 托胎於萬頃縣之佛居村調意氏. 若其初度之榮祥, 氏族之高寒, 出世化度機緣, 語句之靈軌芳踪, 未有傳記 難以詳悉. 雖其曾有所記, 都是世諦門中空花幻蹟, 實際理地, 總沒校涉, 此先師之宜應通禁. 而不錄者也. 古亦有言名高不用鐫頑石, 路上行人口是碑. 由是觀之, 則今金公屬余爲記, 未得古意. 余若强記, 常寂光中, 恐興不肯之冥譴也. 或曰, 契理不契機, 闕於下化. 契機不契理, 疎於上求. 契理契機, 上求下化, 俱爲得中矣.古人之不記, 專於契理. 今人之爲記, 兼於契機. 是不亦有得於俱中之通道乎. 余曰 遂錄口碑之實, 以作背銘之傳.



海陽後學草衣意恂 謹 



“세전에 말하기를 ‘괴로움은 원이 많은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이 없고, 원이 많은 괴로움은 부처님보다 더한 이가 없다’고 하였다. 약사여래는 십이대원을 발하였고, 아미타불은 법장비구로 있을 때에 사십팔원을 발하였으며, 석가여래는 보해범지로 있을 때에 오백서원을 발하였다. 아미타불의 원은 약사여래의 세 배이고, 석가여래의 원은 아미타여래의 백 네 배이다. 그 원을 실천하는 고행은 더욱 넓고 넒어서 두 부처님보다 우뚝 뛰어났다. 그러나 세상에서 원하는 괴로움은,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여기어 그 괴로움을 버리고 즐거움을 구하기 때문에 괴로움도 떠나지 않고, 즐거움도 찾아오지 않는다. 부처님이 원하는 괴로움은 괴로움에 처하여 괴로움을 행하면서도 즐거움을 잊는 까닭에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지고 즐거움이 스스로 찾아온다. 이것이 세간과 출세간에서 원하는 괴로움과 즐거움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느끼는 점이다. 대저 이 여러 가지 원(불보살의 원)은 모두 널리 베플어서 중생을 제도하자는 큰 서원이다. 그러므로 성불한 뒤에는 으레 다 본래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인연따라 중생의 세계에 현화하는 것이니, 예컨대, 저 서천(인도)의 유마거사(維摩居士)는 비야리성(毘耶離城)에서 현화하였으니, 곧 금속여래(金粟如來)의 후신이요, 금릉(金陵)의 보공선사(寶公禪師)는 제(齊)·양(梁) 때에 태어났으니 곧 관음불의 응신이요, 쌍림의 선혜대사(善慧大士)는 소량(蕭梁) 당시에 태어났으니 곧 미륵불의 응신이다.

   우리 동국(東國)의 진묵대사는 명종조(明宗朝)에 탄생하였는데, 곧 석가모니불의 응신이시다. 대사의 법휘(法諱)는 일옥(一玉)이요, 진묵은 자호(自號)이다. 만경현(萬頃縣) 불거촌의 조의씨(調意氏)에게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의 빛나는 상서(祥瑞)와, 그의 씨족이 높이 드러나고 한미한 것과 출세한 뒤의 중생을 교화제도한 기연(機緣)과 어구(語句)의 영이(靈異)한 궤적(軌迹)과 꽃다운 발자취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으므로 상세히 알기는 어렵다. 비록 기록한 것이 있다 하여도 이는 모두 세체문(世諦門) 가운데 공화(空花)요, 환적(幻蹟)으로서 그 사실을 밝히는데 있어서는 모두 참고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진묵대사가 아마 자신에 대한 기록을 하지 못하도록 통렬히 금하였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또 전하는 말에, ‘이름이 높다고 해서 거친 돌에 새길 필요는 없고, 노상에 다니는 사람들의 입이 곡 비석이다’라고 하였다. 그 말에서 생각한다면, 이제 김공이 나에게 부탁하여 진묵대사에 대해 기록하게 함은 고인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만약 굳이 기록한다면, 상적광토(常寂光土) 중에서 진묵대사께서 달갑지 못하다는 꾸지람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혹자가 말하기를, ‘이(理)에 계합하고 기(機)에 계합하지 못하면 하화(下化)가 결여되고, 기(機)에 계합하고 이(理)에 계합하지 못하면 상구(上求)에 소홀하니 이(理)에 계합하고, 기(機)에도 계합해야만 상구(上求)와 하화(下化)가 함께 중도(中道)를 얻으리라. 하였는데, 진묵대사가 기록하지 않음은 오로지(理)에만 계합함이요, 금인(今人)이 기록함은 기(機)에의 계합도 겸하는 것이니 이것이 중(中)을 갖추어 도(道)를 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하기에 나도 그렇다 하고 드디어 오래도록 전해 오는 말의 실(實)을 기록해서 배명(背銘)의 전(傳)을 짓는 바이다.



해양후학 초의의순 삼가 씀



초의선사는 서문을 마치고, 이어서 역시 해양후학초의의순찬(海陽後學草衣意恂撰)으로 ‘진묵조사의 유적고’를 적었다. 산새가 노래하는 소리와 함께 두륜산의 먼동이 터올 때, 초의선사는 진묵조사의 유적에 대한 글을 모두 마치었다. 수백년간 구전으로만 전해온 진묵조사의 일화가 초의선사의 원력어린 붓끝으로 최초로 문자화 된 것이다. 당대 승속에서 대문장가로 인정받는 초의선사의 원력어린 붓은 능살능활(能殺能活)하고 작불작조(作佛作祖)하는 능력이 있었다.

아침공양이 끝나고, 다실에서 차를 마실 때, 김기종은 초의선사로 부터 글을 건네받아 소리를 내어 봉독하였다. 글읽기를 마친 김기종은 감격해서 온몸이 떨리고 입이 딱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는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묵조사님을 석가모니불의 응신(應身)으로 해주시었군요.”
초의선사는 찻잔을 들어 마시고 나서 껄껄 웃고는 정색하여 김기종의 눈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깨달은 본분 상에서 볼 때에는 일체의 성현이 부처님의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의 하나요, 응신의 하나인 것이요. 다시말해 깨달음과 자비로 요익중생(饒益衆生)하는 사람은 모두 부처님의 응신인게요, 아시겠소?”
 초의선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눈을 들어 김기종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김공이 존경하는 진묵조사에 대한 나의 글은 속세로부터 같은 승려가 침소봉대(針小棒大 )하고 날조(捏造하였다고 비난받을 수가 있소. 김공이 진정 진묵조사를 세상에 알리려면, 나같은 승려와 김공 같은 유생이, 즉 유불(儒佛)이 합심하여 진묵조사를 증거하고, 찬양하고, 섬기는 마음을 문자화해야 할 것이오. 나는 내가 아는 제산(霽山)스님을 동참하게 할 것이요. 김공은 나의 깊은 뜻을 헤아려 뜻이 같은 유생을 더 많이 만나 진묵조사님을 증거하고, 찬양하며, 섬기는 글을 받아야 할 것이오. 오늘은 우선 유생의 입장인 김공부터 글이 필요하오. 아시겠소?”
  김기종은 일순 두눈을 반짝이며 기뻐하더니 곧이어 부끄러운 얼굴이 되어 대답했다.
  “초의선사님의 말씀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가 솔직히 밝혔듯이 저 자신은 문장력이 없어서 어찌해야 할 지 난감할 뿐입니다.”
 초의선사는 어젯밤 자신이 별도로 적은 종이를 건네주면서 말했다.
  “진묵조사를 세상에 알리려는 김공의 고마운 정신을 생각해서 내가 김공의 이름으로 서문을 써보았는데, 읽어보시고 고치어 쓰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소?”

   김기종이 글을 받아드니 진묵선사유적고서(震默禪師遺蹟攷序)라는 제목의 서문이었다. 끝에는 은고거사김기종서(隱皐居士金箕鍾序)라고 씌여 있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명문의 서문을 봉독한 김기종은 감격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초의선사에게 또 삼배의 큰절을 올리어 감사를 표시하였다. 초의선사는 앞서의 자신이 적은 찬(撰)에 전주에 사는 승려를 동참시키어 교남후학제산운고교(嶠南後學雲皐校)라고 적어 넣었다. 보름달 하나가 일천강에 비추이듯(月印千江水), 초의선사는 자유자재한 능력을 보인 것이다.
  김기종은 초의선사의 원고를 받아 하산할 때, 거듭거듭 합장하여 인사를 하면서 다짐하듯 이렇게 말했다.
  “저는 곧바로 ‘진묵조사유적고’를 목판본으로 인쇄하여 전국에 유포하겠습니다. 출판기념일에 초청장을 보내겠습니다. 꼭 참석하시어 증명하기고 법어를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일지암을 떠나가는 손님을 보내는 초의선사는 이렇게 말하고 껄껄 웃는 것이었다.
 “김공은 전생에 진묵조사의 진실한 상좌였을 것이오. 상적광토에서 진묵조사는 분명, 기뻐하실 것이오.”

   그 후, 김기종은 약속대로 목판본으로 ‘진묵조사유적고’를 인쇄하였다. 출판기념일에 초의선사는 그곳에 가서 증명과 설법을 해주었다. 초의선사의 진묵조사에 대한 서문과 찬문을 읽은 유생과 승려들은 모두 감격하였다. 그들은 초의선사의 뜻에 동참하여 다투어 진묵조사를 증거하고 찬양하며 섬기는 글을 지어 바치었다.

  진묵조사의 이야기는 상하로 나뉘어졌다.
  상편은 초의선사의 ‘진묵조사유적고’이고, 하편은 부록으로써 진묵조사유적고하(震默祖師遺蹟攷下)라는 이름으로 진묵조사에 대한 각계 명사들의 숭모적인 대표 글들을 집합한 것이다. 대략, 유생인 지원(芝園 조수삼(趙秀三)이 쓴 영당중수기(影堂重修記), 초의선사가 쓴 발(跋), 제산스님이 쓴 글, 유생인 군인(郡人) 김영곤이 쓴 진묵선사유사발(震默禪師遺事跋), 등이었다.

   그 후, 초의선사의 글이 모본(母本)이 되어 대흥사의 승려문인 범해각안(梵海覺岸)스님(1820∼1896)이 동사열전(東師列傳)에서 진묵조사를 다시 언급하였다. 그리고 동국대 전신인 혜화전문학교 교장이요, 당대 제일 강백이었던 석전영호스님의 찬(撰)으로 진묵조사무봉탑병서(震默祖師無縫塔 序)가 있다. 역시 모두 초의선사의 서문과 찬(撰)에서 요원의 들불처럼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초의선사의 서문과 찬문에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는가?
 첫째, 조선조에 들어와서 유생들은 척불숭유(斥佛崇儒)사상을 주장하면서 불교를 무군무부지교(無君無父之敎)로 몰아부쳤다. 한 가문의 자식으로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면 임금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할 수 없는 것을 비난한 것이다. 그러나, 승려의 임금에 대한 충성은 저 임난의 승병들이 주창하고 목숨을 던져 실천한 호국사상에서 충성심을 의심할 여지없이 충분히 보여 주었다. 다음은 불가의 효사상이다. 불교에서 효사상을 권장하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이 있다. 부처님은 부모은중경 속에서 효사상을 강조하고 실천하고 계시지만, 초의선사는 명망 있는 우리의 고승의 예(例)를 통해 부모에 대한 효사상을 대표적으로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초의선사는 진묵조사를 통해 불가의 효사상이 분명 존재 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림으로써 효사상에 대한 부정적인 눈을 가진 유생들을 깨우치었다.
  둘째, 승려의 일생에 걸친 수행과 교화에는 무소유사상이어야 한다는 것을 진묵조사를 통해 다시 깨우치었고,
 셋째, 승려는 부처님이 내리신 계율을 엄수해야 하지만, 때로는 계율을 초탈하여 정신세계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진묵조사를 통해서 세상에 알리고저 하였다. 초의선사의 찬문에 등장하는 진묵조사는 불가의 고승이면서, 곡차( 茶=술)를 즐기는 승려였다. 초의선사는 진묵조사를 통해서 승려의 곡차문화를 미화하였다.

어쨌거나 초의선사의 곡차론, 즉 진묵조사가 즐기었든 곡차의 이야기는 어둠 속에서 숨어서 음주하든 일부 승려들을 해방시켰다. 불가의 새로운 곡차론은 전국에 유포되었고, 술을 마시든 승려들은 떳떳이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저녘 예불을 마친 어두운 밤, 일부 승려들은 이러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화두가 통 들리지가 않구먼. 우리 다도나 하면서 대화나 할까?”
 “무슨 다도?”
 “곡차.”
 “좋지. 곡차의 다도는 우리같이 외로운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닌가. 견성성불 하기 위해서 삭발위승하여 부모형제를 칼로 베듯 작별하여 승려가 되어 청춘을 바쳐 수행정진 하였지만,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비구승이니 처자가 없고, 무소유사상으로 중생구제에 전념하였으니 개인적인 재물이 있을 리 없지. 남루한 누데기 옷으로 감싼 몸마저 늙고 병이 들어 저승길을 생각하는데, 곡차 한 잔 아니할 수 없지…. 안 그런가?”

   자, 이제 독자여러분을 위해 초의선사의 찬문인 진묵조사유적고를 통해서 진묵조사의 격외의 초탈한 모습을 이야기하기로 하자. 이야기가 재미가 없다면, 서투른 이야기군인 필자의 잘못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이야기를 초의선사의 찬문에서 직역한다면, 재미가 부족할 것 같아서 지면관계상 발췌하여 나름대로 구성하여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한다.

   -만월이 중천에 떠서 삼라만상을 비추이는 고요한 밤이었다, 초의선사의 해묵은 진묵조사유적고의 목판 책의 문자에서 안개가 피워 오르고, 그 안개 속에서 진묵조사가 나타나 걸어나왔다. 그는 낡고 헤어진 가사장삼을 입고, 석장을 짚고 있었다. 그는 곡차에 대취한 모습이었다. 그는 대취한 상태에서 밤하늘을 향해 앙천대소를 터뜨리고는 춤을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면서 만월을 향해 큰소리로 자작시를 외치듯 읊었다.


天衾地席山爲枕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를 삼고

月燭雲屛海作樽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으로 만들어

大醉居然仍起舞

크게 취하여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却嫌長袖掛崑崙

도리어 긴 소매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 하노라.



상기 진묵조사의 시는 고금의 승려로써 취흥이 도도할 때 읊은 시로는 가장 뱃포가 큰 유일한 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달빛아래 홀로 대취하여 시를 읊으며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든 진묵조사는 만월을 우러렀다. 만월의 달 속에 노모와 여동생의 얼굴이 보였다. 노모와 여동생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묵묵히 진묵조사를 내려보고 있었다.
며칠전 노환으로 자리보전을 하고 있는 노모는 노안에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속에 진묵조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외아들이 출가위승하여 비구승의 길을 걷고 있으니 이제 조상의 제사는 물론이오, 내 제삿밥도 못얻어 먹게 생겼으니 이런 박복한 팔자가 어디 있을까?”
 진묵조사는 뼈만 남아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노모의 손을 잡고서 소리 없이 울면서 장담하듯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
 “어머님, 제사일로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죽더라도 저와 같은 후학 승려와 속가의 불자들이 어머니의 제사는 물론, 때마다 공양을 올릴 수 있도록 천하의 명당인 무자손천년향화지지(無子孫千年香火之地)에 어머님을 모시겠습니다.”
노모는 아들의 말이 지극한 효심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자손이 없이도 천년동안 향화를 받고 때마다 공양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은 도시 믿기지가 않았다. 역사에 어떤 제왕도 그런 복을 누렸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실현성이 없는 말이었다. 노모는 아들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한 말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슬퍼졌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물었다.  “정말, 그 천년향화지지가 있다는 것이냐?”
 “제가 언제 어머님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지 않아요? 제 말을 믿어 주세요.”

만월속에 어머니와 여동생의 모습이 사라졌다. 달빛만이 교교할 뿐이었다. 진묵조사는 노모가 왜막실(倭幕村)에서 모기떼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노모가 계시는 곳으로 가서 그곳을 관장하는 산신을 불러서 모기떼를 쫓아야 겠다고 생각하였다. 진묵조사는 석장소리를 내면서 자욱한 안개 속으로 사라져갔다.

진묵조사는 조선 명종조(明宗朝), 임술년에 오늘의 전북 김제 만경의 불거촌(佛居村= 현재 火浦)에서 어머니 조의씨(調意氏)에 의해 태어났다. 진묵조사의 이야기에는 시종 부친의 이야기가 전해오지 않는다. 왜 일까? 진묵조사는 나이 일곱살에 출가위승하여 전주의 봉서사(鳳棲寺)에서 불전(佛典)을 배웠다. 어린 사미는 지혜총명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불경의 현묘한 이치를 깨달아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어느 날, 봉서사의 주지스님이 진묵사미에게 부처님을 옹호하는 신중단(神衆壇) 을 청소하고 향피우게 하는 소임을 맡기었다. 진묵사미가 신중단을 청소하고 향 피운지 며칠이 안되는 날 밤, 주지의 꿈속에 창검을 든 신장들이 찾아와서 말했다.
“우리 신장들은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이거늘, 너는 어찌하여 부처님에게 예를 받게 하는가? 진묵사미는 부처님의 응신이니 당장 우리의 향 받드는 소임을 바꾸어서 우리들로 하여금 조석을 편히 지내게 해주기 바란다.”
주지는 벌벌 떨면서 약속하고 꿈에서 깨어났다. 주지는 대중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면서 진묵사미에게 경의를 표하게 하였다.
진묵사미가 창원의 마산포를 지날 때였다. 어떤 소녀가 보고서 연모하는 마음을 고백하였다. 그곳에 머물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진묵사미는 별무관심으로 그곳을 떠나 전주로 와 버렸다. 소녀는 낙심하여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소녀는 진묵사미에 대한 연모의 정으로 환생하여 남자로 태어났다. 그는 기춘(奇春)이라는 동자가 되었고, 마침내 동자로써 전주의 대원사에서 진묵조사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진묵조사는 그를 걷우워 시동(侍童)으로 삼았다. 승려들이 진묵조사를 시험하기 위해서 이렇게 제안하였다.
“우리도 함께 먹을 수 있도록 기춘이를 위해서 국수를 만들어 주시었으면 합니다.”
“국수공양을 하자구? 좋지. 각기 발우를 펴도록 하시게. 그리고, 기춘이는 내 발우를 비롯해서 기춘이 발우, 그리고 저 승려들의 발우안에다 바늘 한 개씩을 넣어라.”
  진묵조사는 기춘이가 바늘을 넣자 합장하고 주문을 외웠다. 기적이 일어났다. 진묵조사와 기춘이의 발우에는 국수가 가득하여졌다. 그런데, 진묵조사를 시험하려는 승려들의 발우에는 여전히 바늘 한 개만 있을 뿐이었다.

진묵조사는 일찍이 술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술을 곡차라고 하면 마시고, 술이라고 하면 절대 마시지 않았다. 어느 절에서 일꾼들에게 주려고 술을 거르고 있었다. 술의 향기가 방에서 좌선하든 진묵조사의 코를 자극하였다. 진묵조사는 석장을 짚고 술을 거르는 승려에게 다정히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거르시는가?”
 승려는 진묵조사의 속마음을 환히 알았다. 곡차를 거른다고 하면 한 잔 보시하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승려는 진묵조사에게 술을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큰소리로 퉁명스럽게 대꾸하였다.
 “술을 거릅니다!”
 “술이야? 곡차라면 한 잔 얻어 마시려고 하였더니….”
진묵조사는 아쉬워하는 얼굴이 되어 석장을 끌면서 되돌아갔다. 그러나 진묵조사는 다시 찾아와 또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거르시는가?”
 “술이라니까요!”
 진묵조사는 세 번째 다시 찾아왔다.
 “그대는 무엇을 거르시는가?”
 “술을 거른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진묵대사는 희망을 잃고 슬픈 표정으로 석장을 끌면서 돌아갔다.
 그 직 후, 진묵조사를 옹호하는 신장인 금강역사가 분노하여 철추(鐵鎚)로써 술거르는 중의 머리를 내려쳤다. 철추가 승려의 머리와 부딪는 그 순간, 승려는 술을 거르다가 실족하여 뒤로 자빠지면서 땅 표면에 솟은 뾰족한 바위에 뒤통수를 부딪쳐 피를 낭자하게 흘리면서 죽고 말았다.

진묵조사가 변산 월명암에서 수행정진할 때이다. 사원경제가 어려워 승려들은 모두 탁발에 나가고, 진묵조사와 시자 단 둘이서 절을 지키고 있었다. 때마침 시자가 기고(忌故)가 있어 속가에 나가야만 하였다. 시자는 떠나기 전에 진묵조사에게 말하였다.
“탁자위에 공양물을 올리었으니 때가 되거든 친히 불공을 지내시고 난 후, 공양을 드세요.”
그 때, 진묵조사는 자신의 방안에서 방문을 열고 한 손을 문지방에 대고서 능엄경을 보고 있었다. 시자가 이튿날, 암자에 돌아와 보니 진묵조사는 어제와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데, 바람에 문짝이 다치는 바람에 손가락이 문짝에 상하여 피가 흐르는데도 손의 상처도 망각한채 태연히 능엄경만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진묵조사는 만년에 항상 자신의 출가지인 봉서사에 머물렀다. 그는 봉서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봉곡(鳳谷)선생이라는 거유(巨儒)를 찾아가 담론하기를 좋아하였다. 어느 날, 봉곡선생이 찾아온 진묵조사를 사랑채에서 정중히 대접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대사께서는 불경만 보지 말고, 공맹(孔孟)의 학문도 보시는 것이 좋을 듯 한데 어찌 생각하시오?”
“깊은 이치가 있습니까?”
 “있지요.”
 “서책을 빌려주시지요. 그런데 곧바로 돌려드릴 터이니 일꾼 한 사람을 제 뒤에 따르게 하시지요.”
 봉곡선생은 진묵조사의 뜻을 곧바로 깨닫지 못하였으나 서책을 빌려주고 일꾼에게 뒤를 따르게 하였다. 진묵조사는 걸망에 가득 유교의 서책을 담아 봉서사로 향해 길을 걸으면서 서책을 읽어나갔다. 어찌나 빠른 속독인지, 걸망가득한 유교의 책을 봉서사에 이르기전에 모두 독파하고, 뒤를 따르는 일꾼에게 버리듯이 던졌다. 일꾼에게 그 소식을 들은 봉곡선생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봉곡선생은 진묵조사를 찾아와 서책을 버린 사유를 따졌다.
 “대사는 왜 귀한 서책을 빌려가지고 가면서 읽지도 않고 길에 버린 것이오?”
“책을 다 읽고 뜻을 깨우쳐서 일꾼에게 책을 돌려준 것 뿐입니다.”
 “뭐요? 그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서책을 독파하였다는 말이오?”
 “시험해보십시오. 제가 대답해드리지요.”
 봉곡선생이 서책에 대해 온갖 질문을 다 해보았다. 진묵조사는 서책에 대해서 아예 줄줄 외우고 있었다. 오히려 서책의 명확한 뜻을 봉곡선생에게 깨우쳐 주었다. 봉곡선생은 감탄하였다. 그는 진묵조사를 더욱 존경하는 마음을 갖었다.

  봉곡선생이 하루는 여종을 시켜 진묵조사에게 음식을 보내드리도록 하였다. 음식을 싸들고 길을 걷는 여종의 눈앞에 멀리서 진묵조사가 허공을 응시하면서 서 있었다. 여종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면서 다가가 주인의 뜻을 전하였다. 그 때, 진묵조사는 음식은 아랑곳 하지 않고 여종의 눈을 응시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장차 나라의 큰 인재가 될 아들을 갖고 싶으냐?”
“무슨 뜻이옵니까?”
 “내가 너에게 그 아들을 만들어 주고 싶구나.”
여종은 그 뜻을 짐작하고 얼굴에 노기를 띠면서 완강히 거부하여 대꾸하였다.
 “노스님께서 어린 저에게 농담을 너무 심하게 하시네요.”
 진묵조사는 탄식하여 말하였다.
 “네가 박복하여 내 말을 듣지를 않는구나. 어쩔 수 없지. 너는 곧바로 주인에게 달려가 내가 곧 당도할 것이라고 말씀드리거라.”
 여종은 화가 나서 집으로 달려가 주인에게 진묵조사가 한 말에 대해서 일러 바쳤다. 봉곡선생은 단 한번도 여색을 말하지 않는 진묵조사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잠시 후, 사랑채에서 두 사람이 찻상을 놓고 대좌하였을 때, 진묵조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만나기 어려운 영기(靈氣)가 서쪽 하늘에 떠올랐습니다. 그 영기를 여인의 몸에 주입을 시키면 나라의 큰 인물이 되는데, 마땅한 여자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 영기가 상서롭지 못한 곳으로 흘러들까 두려워서 멀리 허공 밖으로 물리치고 오는 길입니다.”
  “그래서 내 집의 여종에게 그러한 말을 하신게요? 그렇다면, 박복한 여종의 거부로 나라의 큰 인재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요?”
“그렇습니다. 분명히….”
 “박복한 여종에 대해 내가 사과하리다. 어떻소, 내가 사과주, 아니 곡차를 내놓는 것이?”
 두 사람은 방안이 떠나가라 대소 하면서 곡차를 주고받았다.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선생은 어떤분인가?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봉곡선생의 비문을 찬(撰)하였는데, 찬문을 보면 봉곡은 거유 사계(沙溪)선생의 문하생으로서 인조 때, 의금부도사, 사헌부감찰, 한성판관,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벼슬을 고사하고 낙향하여 향리에서 올곧은 유생으로서 명망을 떨치고 있었다.

  진묵조사가 시냇가에 이르니 소년들이 그물로 고기를 잡아서 큰 솥에다 물고기를 끓이고 있었다. 그는 솥안에서 지글지글 끓는 물고기를 보면서 탄식하여 말하였다.
 “발랄한 물고기가 아무 죄도 없이 잡혀 가마솥에서 삶는 괴로움을 받는구나.”
소년들이 진묵조사의 곁으로 몰려왔다. 우두머리 같은 소년이 희롱조로 진묵조사에게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이 고기국을 드시겠어요?”
 “나야 잘 먹지.”
 “저 물고기들을 모두 드릴 터이니 잡수어 보세요.”
 “그래도 이의가 없겠느냐?”
 “저희들은 이의가 없습니다.”
 진묵조사는 흐뭇한 웃음을 짓고서는 두 손으로 솥을 번쩍 들어서 순식간에 뜨거운 물고깃국을 마시어 삼켜버렸다.
 “뜨겁지 않아요?”
 소년들은 놀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맹랑하게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부처님은 살생을 못하게 하시었는데, 스님이 물고기국을 마셨으니 어찌 스님이라고 하실 수 있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어른 아이를 막론하고 스님한테 술과 고기를 대접하고서는 뒤통수치는 교활한 폐습은 똑같았다.
 진묵조사는 껄껄 웃고는 소년들에게 말하였다.
  “물고기를 죽인 것은 네 녀석들이지만, 죽어 삶긴 물고기를 살리는 것은 바로 나이다. 알겠느냐?”
소년들은 놀라운 눈을 하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스님은 거짓말을 잘하시네요. 어떻게 그 물고기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내가 정말 그 물고기를 살려낼 터이니 두 눈을 크게 뜨고 똑똑히 보아라. 너희들은 모두 가까이 와서 나의 항문을 유심히 지켜보아라. 알겠느냐?”
 진묵조사는 시냇물에 들어가 바지를 내려 엉덩이를 까서 높이 처들어 소년들에게 보여 주었다. 소년들은 모두 진묵대사의 항문에 바싹 다가와 항문을 응시하였다. 진묵조사가 웅얼웅얼 주문을 외우더니 얏! 힘을 썼다. 그 때, 그의 항문에서는 설사가 쏴- 쏟아졌다. 소년들의 얼굴에 몸에 설사물이 범벅이ㅏ 되고 말았다. 그 때, 설사 속에 물고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항문에서 나온 물고기들은 물속으로 떨어져 비늘을 번쩍이면서 생기발랄하게 놀았다. 진묵조사는 시냇물로 항문을 닦은 후, 바지를 올리고 나서 물고기들을 향해 천연스럽게 말했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멀리 강해(江海)로 나가 노닐되, 미끼를 탐하다가 다시는 인간에게 잡혀 억울하게 죽지 말거라.”
소년들은 진묵조사의 신기한 신통력을 보고서 모두 엎드려 큰절을 올리고 참회하였다. 진묵조사는 소년들에게 살생의 업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예화를 들어가며 깨우치었다. 소년들은 진묵조사에게 다시는 물고기를 잡아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그물을 거두어 떠났다.

 하루는 진묵조사가 선정에 들어 있다가 깨어나 황급히 시자를 불러 말하였다.
 “합천 해인사가 불이 났구나. 팔만대장경각이 불타버리면 큰일이다. 내가 그 불을 끄고져 하니 어서 바가지에 물을 떠오너라.”
 때마침 시자는 미지근한 쌀뜨물을 갖다 드리려고 가져오고 있었다. 진묵조사는 물그릇을 집어 주문을 외우고는 물을 입에 가득 머금고, 동쪽 하늘을 향해 힘껏 내뿜었다. 훗날 확인하니 그 때 해인사에 불이 났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져 그 불을 껐다고 한다.

  천계(天啓=명나라 熹宗의 년호) 임술(1622)년에 완부(完府= 지금의 전주)의 송광사와 홍산의 무량사에서는 불상조성을 하여 같은 날 같은 시에 봉안식을 하게 되었다. 봉안식에는 불상의 점안식이 있게 되어 있는데 두 절에서 똑같이 진묵조사를 증명법사로 초청장을 보내왔다. 진묵조사는 어느 쪽에도 가지 않았다. 다만, 두 절에 진묵조사가 항시 사용하든 신물(信物)을 보내었다. 송광사에는 주장자를 보내고, 무량사에서는 호두알만한 단주를 보내었다. 그 신물을 각 봉안식이 있게 되는 사찰의 증명법사단(證明法師壇)에 올려 놓으라고 분부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신물은 곧 나이니라. 내가 곧 두 절의 증명법사단에 신물을 보내었으니, 곧 내가 그곳에 직접 임석하여 증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경계의 말을 주건대, 두 절의 화주승은 불상 점안식이 끝날 때 까지는 절대 산문 밖을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만약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신장의 벌이 있을 것이니라.”

송광사에는 증명단에 주장자를 세워 두었는데, 밤낮으로 꼿꼿하게 서서 넘어지지 않았고, 무량사에서는 단주를 증명단에 올려놓았는데, 단주가 마치 손으로 헤아리듯 소리를 내면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무량사에서는 홍산의 어느 사람이 삼천금을 내어 혼자 그 삼존불 조성의 비용을 부담한 것인데, 봉안식 전 날 밤에 사찰을 방문하겠다는 전언이 왔다. 화주승은 그 돈많은 시주님을 나가서 영접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깜박 진묵조사의 경계의 말씀을 망각하고 산문을 나섰다. 그 때, 하늘에서 뇌성이 울리고 신장이 나타나 철퇴로 화주승을 내리쳤다. 진묵조사의 경계의 말씀의 요지는 불상조성과 봉안에 있어서 점안식이 끝날때 까지는 불사의 중심이 되는 승려, 즉 화주승은 오직 기도만 할 뿐, 절대 산문 밖을 외출해서는 안된다는 경계였든 것이다.

  진묵조사가 상운암에 주석하실 때이다. 사찰경제가 어려워 진묵조사를 제외한 모든 승려들이 결제를 앞두고 식량확보를 위해서 탁발에 나섰다. 승려들이 멀리 탁발을 나가 한 달 남짓하여 돌아왔는데, 진묵조사를 찾으니 탁발 떠날 때 보았든 좌선자세로 두눈을 감고 선정에 들어 있었다. 진묵조사의 얼굴에는 거미줄이 처지고, 무릎사이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승려들이 놀라 거미줄을 걷어내고 먼지를 쓸어내고서 큰 절을 하여 “아무개 돌아왔습니다.”하고, 인사를 드리니 진묵조사는 그제서야 선정에서 눈을 뜨고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어찌도 이리 빨리 돌아왔느냐?”

진묵조사는 출가승려이지만, 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어머니를 당시 왜막실에(현재, 완주군 용진면 아중리)에 모시고 효도를 다하였다. 노모가 모기떼의 극성에 고통을 받자 진묵조사는 왜막실을 관장하는 산신을 불러 모기떼가 일제히 사라져 나타나지 않도록 명령하였다고 한다.
마침내 노모는 세상을 떠났다. 진묵조사는 애통히 울부짖으면서 노모생전에 약속한 천하의 명당인 ‘천년향화지지’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노모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며 승려들과 함께 지극지성으로 49제를 올리었다. 그 때, 진묵조사는 슬피 울면서 노모의 영전에 다음과 같은 불후의 제문을 지어 바쳤다.

胎中十月之恩何以報也 膝下三年之養未能忘矣
열달동안 태중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리요/슬하에서 삼년동안 길러주신 은혜 잊을 수가 없습니다.

萬歲上更加萬歲子之心 猶爲嫌焉百年內未滿百年
만세 위에 다시 만세를 더 하여도 자식의 마음에는 부족한데/백년 생애에 백년도 채우지 못하시었으니

母之壽何其短也 單瓢路上行乞一僧旣云已矣
어머니의 수명은 어찌 그리 짧습니까/한 표주박을 들고 노상에서 걸식하는 이 중은 이미 말할것도 없거니와

橫차閨中未婚小妹寧不哀哉
비녀를 꽂고 아직 출가하지 못한 누이동생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上壇了下壇罷僧尋各房 前山疊後山重魂歸何處
상단불공과 하단의 제가 끝나니 승려는 각기 방으로 찾아가고/앞산 뒷산 첩첩산중인데 어머니의 영혼은 어디로 가시었습니까.

嗚呼哀哉
아! 슬프기만 합니다!

진묵조사가 어머니의 영전에 바친 제문은 전국승려에게 전파되었다. 그 제문을 받아 읽은 승려들 가운데는 각기 떠나온 어머니를 생각하고, 효도를 하지 못한 자책감에 대성통곡하는 승려가 부지기수였다. 어쩌면 진묵조사의 제문은 만세를 두고 불교가 존재하는 한, 모든 승려들의 사모곡의 제문이 될 것이다.

진묵조사는  노모생전에 약속한 대로 노모를 천년향화지지에 안장하였다. 그곳은 현재 전북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 조앙산이다. 누구의 입에선가 진묵조사의 어머니인 조의씨를 두고 성모(聖母)라는 존칭이 붙여졌다. 누구의 입에선가, 진묵조사 어머니의 묘소의 풀을 깎고, 향화를 바치고, 공양을 올리고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성취할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묘소옆에는 성모암(聖母庵)이 들어서고, 또다른 사찰이 창건되었다. 곧이어 경향각지에서 성모의 묘소를 친견하고 기도하기 위해 향화와 공양을 올리기 위한 순례자들이 줄을 이었다. 성모의 묘소에는 한 시도 빠짐없이 촛불이 밝혀지고 향화가 피워 올랐으며 순례자들의 기도소리가 끝이지 않았다. 진묵조사는 노모와의 약속대로 '무자손천년향화지지'에 노모를 모신 것이다. 한국의 역사에 묘소앞에 촛불 밝히고, 향피우며 온갖 공양물을 올리면서 기도하는 곳은 유일하게 진묵조사의 어머니 묘소뿐일 것이다.

어느 날, 진묵조사는 스스로 삭발하고, 목욕하고나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지팡이를 끌고서 산문을 나가 개울을 따라 걷다가 지팡이를 세우고, 물가에 서서 손가락으로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르키면서 시자에게 말했다.
“저것은 석가모니불의 그림자이니라. 알겠느냐?”
시자는 의아하게 생각하여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화상의 그림자입니다.”
진묵조사는 힘겹게 웃으며 다시 말하였다.
 “너는 화상의 가짜 그림자만 알았지. 석가모니의 참모습은 알지 못하는구나.”
 마침내 그는 지팡이를 어깨에 메고 자신의 선실로 돌아와 가부좌를 하고서 제자들을 불러 작별의 말을 하였다.
 “나는 이제 떠나갈 것이다. 물을 것이 있으면 지금 물어 보아라.”
 제자들은 숨죽여 흐느끼면서 물었다.
 “대사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종승(宗乘=법맥)을 뉘에게 잇겠습니까?”
 진묵조사는 잠시 묵상에 잠겼다가 깨어나 말하였다.
 “무슨 종승이 있겠느냐?”
 진묵조사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열반에 들으려 하였다.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간청하였다.
 “종승을 누구에게 잇겠습니까? 하교하여 주소서.”
 진묵조사는 힘겹게 눈을 떠 간청하는 제자들을 딱한 듯 보면서 마지못해 이렇게 말하였다.
 “굳이 종승을 잇는다면, 명리승이지만, 정장노(靜長老= 서산, 휴정대사)에게 붙여 두어라.”
이윽고 진묵조사는 자신의 열반종 소리를 들으면서 영원한 대적삼매(大寂三昧)에 들어가니 그 때, 그의 세수가 72세요, 법랍이 52이니 곧 계유(1632)년 10월 28일이었다.

진묵조사의 부음을 전해들은 봉곡선생은 대성통곡하며, " 대사는 승려이면서, 행은 진실한 유자(儒者)였다고 증언하고, 애도 하였다.
  이 글을 쓰는 필자는 2003년 어느 봄 날, 홀로 진묵조사의 어머니의 묘소가 있는 곳을 방문하였다. 과연, 성모암이 있었고, 진묵조사의 어머니는 어느 사이에 성모(聖母)요, 신앙의 대상으로 추존되어 기도 예배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묘소 앞에는 젊은 비구니 스님이 가사장삼을 정제하고 목탁을 치면서 소리높여 불호를 부르는 정근기도를 하고 있었고, 수십명의 여신도들이 다투어 촛불을 밝히우고 향로에 향을 피우며, 꽃과 과일, 밥, 쌀, 등 공양을 올리고, 또 지폐를 묘소앞에 바치고 기도발원을 하며 무수히 큰절을 올리고 있었다. 어느 여신도는 염주를 헤아리며 삼천배를 올리고 있었다.부산넘버가 붙은 관광버스가 계속 몰려들어 오고 있었다. 그 기이한 신앙의 풍경에 필자는 아연하였다. 불교를 바로 배우고 깨달은 불자라면 납득이 안가는 신앙의 행위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고개를 가로 저어 딱하게 보았지만, 어찌하랴? 민심이 신앙의 대상을 정해 버렸는데…. 역시 진묵조사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진묵조사의 진영을 모신 ‘진묵전(震默殿)’을 찾으니 전면의 네 기둥에는 앞서의 취흥이 도도했을 때의 뱃포큰 시가 주련(柱聯)에 적혀 있었다.
전각안에는 이상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진묵조사와의 진영과 어머니의 진영, 그리고, 진묵조사의 시집간 여동생마저 처녀 시절의 진영으로 신앙의 대상으로 봉안되어 있었다. 그 가족은 일제히 단상에 불상처럼 앉아 중생의 재앙을 멸하고, 복(福)을 주는 전능한 신(神)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남녀신도들이 역시 촛불을 밝히고 헌향,헌화, 쌀, 과일 등과 지폐를 놓고 다투워 소리높여 중생의 소망을 이루려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
 필자는 단상의 인물들을 보면서 순간, 전각이 떠나가라 앙천대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필자의 돌연한 웃음에 기도하는 남녀들이 걱정스럽게 쳐다보았고, 특히 단상에서 신앙의 대상이 된 진묵조사와 어머니, 여동생이 당황해 하는 듯 보였다. 아마 살아 움직일 수 있다면, 그들은 단상에서 황급히 단하로 내려왔을 것이다. 진묵조사의 여동생의 모습은 같은 화공의 솜씨인가, 춘향이나 논개처럼 예쁘게 그려 있었다. 그녀는 영원한 성처녀(聖處女)로 봉안되어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자출가에 구족이 승천한다', 는 불가의 교훈이 진묵조사의 가족에게 해당되는 것 같았다. 진묵전에 진묵조사의 온가족이 향화를 받는데 그곳의 단상에는 여전히 진묵조사의 부친의 모습은 없었다. 어머니에게 지극히 효도를 보인 진묵대사가 어찌 부친은 챙기지 않았을까? 화두삼아 궁구해보자. 만고의 효자가 왜?

이상한 신앙의 풍경에 놀라운 마음으로 귀로에 오르려고 소나무 숲속을 걷는데, 노송아래에서 한 노승이 묘소에서 기도하는 중생들을 멀리 바라보면서 흐뭇한 얼굴로 파안대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필자가 가까이 가서 인사를 하려니 얼핏 초의선사의 진영을 닮아 있었다. 필자가 눈을 부비고 다시 확인하고자 하니 홀연 그 노승의 모습은 연기처럼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

 

               

(2003년11월17일, 밤, 9시. 치악산 기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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