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모리아, “여름날의 소야곡”과 못잊을 추억

이법철 | 입력 : 2020/07/14 [13:21]

 

▲     ©이법철

신라 때 1천년이라는 세월에 불교는 국교(國敎)였다. 승려가운데는 불교의 학문이 크고 수행력과 자비실천의 행이 뛰어나면 중망(衆望)에 의해 나라의 국사가 되고 왕사가 되는 시절이 신라 때였다. 그 신라의 후예(後裔)에서인가? 부산, 대구, 경주, 진주 등 경상도 지역에서는 불교신자들이 많고 승려 못지 않게 불교수행을 하는 남녀신도들이 많은 편이다. 나는 경상도 어느 도시의 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다방에 혼자 않아 다방에서 울려오는 ‘여름말의 소야곡’을 들으며 지난 날 나의 여정I旅程)에 인연있던 60여 명의 여고생들과 K대위와 Y대위를 떠올리며 추억에 잠긴다.

1970년도 늦은 봄애 나는 해인사에서 해인승가대학을 11회로 졸업하고 곧바로 해인선원으로 입방을 했다. 당시는 성철스님이 해인사 발장(方丈)으로 재직하시며 후학들을 지도 하시던 때였다. 나는 해인선원에서 동안거를 마치고는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 등에서 수성정진을 하였었더.

나는 정진도중 어느 날 몸이 아프기 시작하여 잠시 선원을 떠나 건강을 회복하고자 하여 경북 어느 도시에 있는 아는 선배스님이 주지로 있는 포교당을 찾았다. 선배스님은 나의 사정을 듣고 병의 원인을 지적해주었다. 나는 오랫동안 영양이 결핍되어 기진맥진(氣盡脈盡)한 채로 5년긴 소리내어 경전공부를 하고, 연후 선원에서 수행하였으니 영양 결핍으로 기력이 탈진되어 있었다.

포교당 주지스님은 나에게 거처할 구석방을 내주며 기력이 회복되어 떠날 때까지 불교를 배우려는 여고생들에게 내가 해인사에 배운 불교를 가르쳐 달라는 주문이 있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의 시간에 불교를 가르쳐 달라는 주지스님의 간곡한 청에 나는 고개숙여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 도시에는 3개의 여고가 있었고, 여학생들은 학교에서 책가방을 들고 몰려왔다.

포교당애 몰려온 3개의 여고생들은 2∼3학년들이었다. 금방 60여 명이 되었다. 나는 여고생들이 소속 학교가 다르기 째문에 “ 불교의 화합사상”을 먼저 가르쳤다. 여학생들은 지도법사가 해인슬기대학을 나오고 선원에서 왔다고 주지스님이 소개하니 여학생들이 박수처 환영했다. 아직 탐욕에 때묻지 않았다는 것이리라. 첫 강의가 시작는 때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여러분은 부처님이 효사상(孝思想)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부처님은 태어난 지 일주일만에 생모인 마야부인이 난산(難産)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왕자는 어머니를 늘 그리워 하다가 마침내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없는 세상을 찾기 위해 속세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고행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여러분은 부처님같이 효사상으로 먼저 정신무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겁니다.”

정해진 시간에 3개 여고생들은 교복을 입고 포교당에 모여 법당에 간단한 청소를 하고 불상앞에 청수물을 올리고, 촛불을 키고 법회시간이 되면 삼귀의 와 찬불가를 부르고 자리에 앉아 죽비에 맞추어 입정(入定)한 후 나의 설법은 시작되었고, 설법이 끝난 후는 목탁에 맞추어 석가모니불 정근에 이어 나의 축원이 있고 그 다음 공지사상과 해산이 있었다.

나는 그 때 여고생 회장과 총무에게 법회식이 끝 난후는 어느 여고생이던 나와의 개인면담은 없고, 내방에 출입하는 것을 엄금(嚴禁)하도록 했다. 여학생들은 개인면담이 없다고 불평이 대단했지만, 나는 아름다운 추억을 위해서 사적인 대화는 엄금했다. 포교당 주자스님도 그것을 무척 좋아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불교만 고집하여 강의하지는 않았다. 명심보감, 채근담 등에서 인생에 가슴에 새길 좋은 명문장은 예화와 함께 반복하여 들려주었다. 여학생 회장과 총무는 나의 방에 출입하려는 여학생들을 철저히 통제해주었다. 1넌이 가끼히 다가오면서 나는 건강도 많이 회복되었고, 걸망을 매고 구름에 달가듯이 떠날 때가 되었다.

나는 마침내 여고생들과 이별할 때가 되었다. 한없이 아쉬웠지만 나는 부처님처럼 “버리고 떠나야 했다.” 이별의 법회라는 이름으로 법회를 통해서 작별인사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별을 슬퍼하는 여학생들을 차마 볼 수가 없았다. 나는 작병의 편지를 싸 공양주 보살에게 맡겨 학생들에 전해주기를 바라면서 신세벽에 포교당을 떠나갔다.

상기도 기억하는 데, 당시 청순한 여고생들은 “저희도 스님처럼 결혼하지 않고 수행자가 되렵니다.“ 여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서약을 했다.

나는 여학생들에 첫째, 부모인연을 소중히 하고 효사상을 실천하기를 바랬다. 둘째, 종교의 자유가 있는 자유대한이 너희들의 조국이라고 강조했다. 셋째, 인생에 슬프나 괴로우나 즐거우나 부처님을 의지하고 마음공부를 하여 안심입명(安心立命)해야 한다. 지구의 인생은 영원하지 못하고 정해진 운명의 때거 오면 죽고만다. 우리 영원한 생명과 복락이 있다는 극락세계에서 재견할 수 있기를…. ”

세월이 무심히 강물처럼 흘렀다. 포교당 주지스님도 입적한 지 오래라는 말이 들려왔다. 서울 조계종 신문사에 편집국장으로 근무하는 어느 날, 여군장교 두 명이 내게 면회를 왔다는 구내 전화가 왔다. 2층에서 1층 수위실로 내려가보니 과연 여군대위 두 명이 서서 엄숙히 경례를 부쳤다. “스님계신 곳을 이제사 찾아옵니다. 죄송합니다!”

기슴에 지휘관 패를 단 여군대위를 보고 어안이 벙벙 하는데 그녀들이 나를 깨우쳐 주었다. 나는 경탄했다. ” 오-, 그날의 여고생 회장과 총무였지? “ 우리는 조계사 인근의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추억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60여 명의 여고생들이 토요일에 스님이 떠난 후 포교당에서 울음바다가 되었다는 후일담을 들려주었다. 그녀들이 모두 속세에서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Y대위와 K대위는 서울에서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여군장교시험에 합격해서 지금은 용산 여군 부대에서 1중대장, 2중대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후 토요일만 되면 오후에 두 명은 사복을 입고 조계서 법당에 참배하고, 나를 찾았다. 어느 날 나는 둘에게 물었다.
“결혼한거요?”
“우리는 스님처럼 결혼하지 않고 살면서, 스님이 수행하도록 잘 지켜드리겠습니다.”

1980년대, 유명한 불교법난이 일어나 수많은 승려들이 전국적으로 불법연행을 당하고 고문을 받았다. 나도 고문을 받고 해남 대흥사로 내쫓겼다. 나의 인생여정은 또 변화를 맞이해야 했다. 김대위는 소령 진급과 함께 같은 남자 소령과 결혼을 했다는 말을 들었더. 양대위는 소령진급을 하고난 뒤 군사령부 여군대장이 되었다고 연락해왔다.그러나 앙대위는 소령에서 중령 진급을 하고 난 뒤 인생여정이 끝나 버렸다. 그녀는 독신으로 암(癌)으로 투병하다가 인생 여정이 끝났다는 소식들을 듣고 나는 오열하며 깊이 애도를 표하였다.

불교의 금강경에 인생무상이 여로(如露), 여몽(如夢), 여환(如幻), 여포(如泡), 여영(如影)과 같다고 인생을 깨우친다. 영웅 호걸들과 절세미인과 여장부들이 너무도 허무하게 사라지고 없어져 가는 것이 슬프기 짝아 없다.

끝으로, 나는 이제 늙고 병들어 누워있는 시간이 많고, 어찌보면 낙동깅 오리알 신세가 된 것같다. 아무도 나를 찾아주는 이 없이 살다가 조만간 무(無)요 공(空)으로 떠날 것만 같다. 나는 근기(根器)가 작아 부처님같이 대각을 이루기는 난망한 것같다. 폴모리아의 여름날의 소야곡을 들으면서 그 해에 만나 불교를 가르치던 학생들 60여 명의 행운을 기원하며 내생에 또 재견할 수 있기를 소원해본다. 그날의 여학생들도 이제는 환갑이 훌적 넘고 손자손녀도 보았으리라. 부처님처럼 대각도 못하고 무능한 나는 오직 그들의 행운만 부처님전에 기원할 뿐이다. ◇



李法徹(이법철의 논단 대표)

▲  여고생들 사진, 글 내용과 관계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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